칼럼-고구려와 신라의 출산장려 정책
칼럼-고구려와 신라의 출산장려 정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9.11 18:2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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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고구려와 신라의 출산장려 정책


고대 국가에서 국가를 강성하게 하는 정책 중 하나가 인구 증산정책이었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강대하고 인구가 적은 나라는 약소국이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등의 고사성어로 잘 알려진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는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했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의 노예로 끌려갔다. 백성들과 땅도 빼앗겼다. 쓸개를 씹으면서 마부 노릇을 하고 온갖 굴욕을 겪은 구천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재상 범려에게 특단의 대책을 세우게 한다. 범려는 오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획기적 인구 증산 정책을 세웠다. ‘젊은 남자는 늙은 여자와 결혼하지 마라. 젊은 여자는 늙은 남자와 결혼하지 마라. 여자 열일곱 살이 되어도 시집을 보내지 않거나 남자가 스무 살이 되어도 장가를 가지 않으면 부모가 벌을 받게 하라. 임산부는 나라에서 극진히 돌봐주고 아들을 낳으면 개 한 마리와 술을 주고 딸을 낳으면 돼지 한 마리와 술을 줘라. 쌍둥이를 낳으면 한 명은 나라에서 양육비를 부담하고 세쌍둥이를 낳으면 둘의 양육비를 나라에서 부담하라’ 구천은 현명한 재상 범려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를 선포했다. 이는 20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출산 장려 정책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고구려에서는 취수제도(取嫂制度)가 있었고, 신라에는 근친혼(近親婚)이 성행했다.

고구려는 주몽과 소서노가 건국한 이후 대륙의 강대국이 된다. 역대 왕들이 영토를 확장하고 주위의 작은 부족 국가를 정복해 나갔다. 해인국, 북옥저, 황룡국을 비롯하여 부여국까지 요동에서 차례로 사라지고 고구려만이 남았다. 부여에는 동부여, 북부여 등 여러 국가가 존재했으나 고구려 건국과 동시에 다른 부족 국가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시대는 만주와 한반도 북쪽 지역에 수많은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 국가들도 적지 않았다.

취수제도는 고대 유목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제도로 많은 부족들이 이를 허용하고 있었다. 고대 유목민들에게 여성은 노동력을 생산하는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남자가 죽었다고 해서 다른 부족이나 다른 집안으로 시집보내지 않았다.

고구려 제9대 왕인 고국천왕(故國川王)은 불행하게도 왕비 우씨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 왕비 우씨는 고국천왕이 병을 앓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처로 삼고, 동생이 죽으면 형이 제수를 처로 삼는 취수제도를 떠올렸다. 마침내 고국천왕이 운명하자 우씨는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 그녀는 슬퍼하지 않고 한밤중에 황궁을 비밀리에 나가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 발기(發岐)를 찾아갔다. 발기는 한밤중에 찾아온 우씨가 탐탁지 않았다. “어찌하여 한밤중에 황궁을 나오신 것입니까?” “대왕께서 위중하십니다. 대왕이 돌아가시면 후사를 정해야 하는데 나는 그대가 후사를 이을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우씨는 은밀하게 발기를 왕위에 추대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발기가 노기를 띤 채 잘라 말했다. “하늘의 역수(易數)는 돌아가는 때가 있는데 어찌 이를 가볍게 의논 하리오?” “고구려에 취수제도가 있지 않습니까?” 우씨는 발기가 뜻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둘째 동생 연우(延優)를 찾아갔다. “대왕께서 돌아가셨으므로 발기가 어른이 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뜻이 없어요.” 우씨가 연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우씨는 왕위에 오르면 자신을 왕비로 삼을 뜻이 있느냐고 은근하게 물었다. 연우는 왕비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우씨에게 대접하기 위해 친히 칼을 뽑아 고기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우씨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치맛자락을 찢어 연우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치맛자락을 찢는 것은 속살을 보여 주는 행위이다. 시동생인 연우와 형수인 왕비 우씨는 눈이 맞았다. 우씨와 연우는 고국천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내외에 선포한 후, 제가회의 때 고국천왕의 유언이라며 연우를 즉위시켜 왕으로 삼았다. 제가(諸家)들은 왕의 유언이라는 말에 반대하지 못했다. 연우는 형수인 우씨를 왕비로 맞이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신라는 성골과 진골을 보호하기 위해 동복남매까지도 결혼을 허락했는데 근친혼이 금지된 것은 유학이 들어오고 조선에 성리학이 자리 잡은 뒤의 일이다. 우리나라도 먼 장래를 보고 인구정책을 착실하게 잘 세워나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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