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김맥동·정재흥 항일투사의 공적
진주성-김맥동·정재흥 항일투사의 공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9.20 18:3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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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김맥동·정재흥 항일투사의 공적


김맥동(金麥童)선생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 니전리 출신으로 <고등경찰관계적록>30면에 선생의 활동상이 기재되었는데 1920년 9월 중순경 애국동지 8명과 함께 중국 만주에 소재한 광복단 단원들과 연계를 가지고 서로 기맥을 같이했는데 함양군 지역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제공하라는 서신 또는 협박장을 발송하는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었다.

위와 비슷한 내용이 동아일보 1922년 5월 19일자에도 보도되었는데 밀양군에 사는 주순조(52세)와 함께 광복단원으로 활동하다 마산여관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는 내용이다.

정재흥(鄭在興)선생은 초명 정희순이고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683번지 또는 663번지 출신으로 1919년 3월 18일 진주 3·1운동 당시 교회 종소리를 신호에 따라 시위대열에 참가하고 1921년부터 군자금을 모아 안희제 선생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통해 군자금을 제공할 때 향리출신 정재완 등과 함께 활동한 인물이다.

진주노동공제회 소작부 위원 대표로 활동하고 농민총연맹 대표와 노농연맹 대표로 활동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5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기자대회(全朝鮮記者大會)에 조우제. 정동석. 김기완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시대일보>. <사상운동>기자들은 반항적 요소가 많다면서 일경에 체포되어 엄중한 조사를 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1월 2일 합천군 부호 문재규의 차남 문석봉으로부터 일만원의 거액을 빌려 각기 군자금을 제공하는데 사용토록 하고 어음 편치 및 군자금 제공사건으로 대구지법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언도되어 옥고(獄苦)를 치렀다.

2007년 2009년에 포상신청을 했었고 근거서류를 찾아 재심청구 한다.

정재흥 선생은 광복 후 부산·경남 지역 전매서를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부산전매청장으로 근무 중 1950년 11월경 책상에서 갑자기 혼절해 순직했다.

공무원으로 근무중 50대에 순직했지만 순직 신청을 하지 못했고 지금까지 국립묘지에도 안장되지 못한 억울한 사정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항일투사(抗日鬪士)로 인정(認定)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일제 때 옥고후유증과 피로가 겹쳐 순직했다고 후손들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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