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주 천년의 뿌리(Ⅵ)-애국실천의 진주기생(Ⅱ)
칼럼-진주 천년의 뿌리(Ⅵ)-애국실천의 진주기생(Ⅱ)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0.29 18:2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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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진주문화원 향토사전문위원장·前 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칼럼-진주 천년의 뿌리(Ⅴ)-애국실천의 진주기생(Ⅱ)-강신웅/진주문화원 향토사전문위원장·前 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지난 호에서는 1919년 3월, 당시 우리 진주기생들이 전국에서 최초로 냉엄한 왜경들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과감하게 돌진했던 애국실천의 사연을 기술했다.

오늘 본고에서는 진주기생의 만세 사건으로부터 325여년 이전인 임진년(1592년)과 계사년(15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충절실천의 내용을 기술하기로 한다.

《징비록(懲毖錄,유성룡 저)》에 따르면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왜군에 의해 함락되어 약 7만여 명의 군·관·민 모두가 죽었으며, 소와 말, 개나 닭조차도 모두 도살됨으로써 세계 전사상 그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말 그대로 참혹한초토(焦土)가 자행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접한 논개는 나라의 원수이며, 특히 낭군인 최경회 장군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고, 낭군의 원수인 왜군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 마음을 다잡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왜군이 1953년(선조25년) 7월 7일 진주성 내 촉석루에서 승전연회(勝戰宴會)를 열었다. 이에 논개는 왜군이 진주의 전기생들에게 연회를 참석하라는 사실을 알고서 자신을 기생이라 속이며 그 연회에 참석하였다. 기생복장으로 분장한 논개는 촉석루에서 술에취한 왜군의 장수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게야무라로구스께)를 촉석루 아래 강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위암(危巖)으로 유인하여 두팔로 그를 껴안고 급히 흐르는 강물에 함께 투신했다.

이 사건의 원문인 《징비록》에 보면 “官婢論介, 凝粧靚服, 立於矗石樓下, 峭岩之前, 其下萬丈直人波心, 倭見近而獨一倭挺然直進, 論介笑而迎之, 遂抱其倭直投于潭”으로 기록되어 있다. 논개는 두손 열 개의 손가락으로 손 가락지에 무쇠가락지를 끼었다. 혹 껴안은 왜군 장수를 놓칠세라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했던 그 바위를 이 후 일명 의암(義岩)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논개를 일명 의암부인이라고 한다. 동시에 그를 위한 추모제 및 행사들이 지금의 의기사(義妓祠)와 남강 일원에서 무려 150년간 이루어지고 있다.

논개에 대한 출신이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여러 설이 있으나, 우선 그 생애에 대한 일반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사실과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암군수로 있었던 최경회 장군의 부실(副室)로써 임란이 발생하자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남원, 무주 등지에서 크게 활동하다가 진주성에 입성하여 왜군과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성이 함락될 당시 논개는 그와 함께 진주에 머물고 있었는데, 얼마 후 진주성 밖에서 최경회 장군의 순절(殉節) 소식을 접하고서 나라의 원수이자 낭군의 원수인 왜군에 대한 적개심과 애국충절의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여 나약한 여인으로써 거룩한 구국실천을 결행(決行)하게 된 것 이었다.

다음호에서는 애국실천을 위하여 앞장섰던 진주기생 산홍(山紅)에 관하여 계속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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