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일제(日帝) 강점기 징용(徵用)
진주성-일제(日帝) 강점기 징용(徵用)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1.14 18:1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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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일제(日帝) 강점기 징용(徵用)


징용이라함은 전시나 사변 등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 있어 보통의 수단으로서는 군사작전상 필요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곤란할 때 보상을 지급하고 개인에게 권력적으로 필요한 역무(役務)부담을 과(課)하는 행정 행위를 말하며 일제 강점기 사람을 강제로 불러내어 부렸고 일제 말기에 일본의 광산이나 공장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강제로 끌어 갈 때 징용장을 발부했다.

일제말기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징용을 당했던 일본 나가사키(長岐)현 남서쪽의 섬 하시마(端島)는 크기가 야구장 2개로 그 규모가 조그마한섬으로 육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위치하고 있다.

1945년에 당시 조선인 500-800명이 이 섬의 지하 탄광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섬 하시마는 일본의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고도 부른다.

조선인 강제징용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탈출극이라는 허구를 뒤섞었다. 이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 사이의 정확한 경계에도 관심이 크다. 징용자들은 혹사와 굶주림, 질병에 시달렸고, 탈출 시도가 빈번했으나 실패에 그쳐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2차대전 기간에는 도망자를 감시하기 위하여 재향군인 회원들이 총을 들고 경비와 감시를 했다. 인근 섬으로 헤엄쳐 도망가다 익사한 경우도 많았고, 붙잡히면 가혹행위가 뒤따랐다.

군함도(軍艦島)의 배경인 하시마 탄광에는 조선인 500-800명 외에도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들이 있었다. 1944년 6월 중국인 노동자 205명이 하시마 탄광에 들어왔고 이듬해 8월까지 15명이 숨졌다. 조선인 생존자들은 하시마 탄광에 중국인뿐 아니라 미군 포로도 있었다. 하시마에서 석탄이 발견된건 1810년쯤이다. 1870년대부터 본격적인 채굴이 시작됐다. 1916년에는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가 들어섰다. 하지만 해저1000m의 지하에서 석탄 캐내는 심해(深海)탄광 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노동환경이 열악한 것으로도 악명 높았다. 이 때문에 1920년대부터 하시마는 군함도와 감옥섬으로 불렸다.

1938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인적 물적 자금의 삼중(三重)착취 구조를 만들었다. 강제 동원 과정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은 기차삯과 뱃삯 밥값까지 빚을 짊어졌다. 작업장에 도착한 뒤에도 일본 기업들은 숙박비와 식비는 물론 신발과 곡갱이 이불에도 사용료를 매겼다. 이 빚은 1년이상 일을 해야만 갚을 수 있었다. 쥐꼬리만한 임금은 우편저금이나 연금이라는 명목으로 또 다시 착취당했다. 미수금은 조선인들의 탈출을 막는 수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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