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투사 허재기 탄신 130주년
진주성-항일투사 허재기 탄신 130주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2.13 19:0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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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 추경화/진주 문화원·향토사학자

호석 추경화/진주 문화원·향토사학자-항일투사 허재기 탄신 130주년


허재기(許在基)선생은 경남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에서 태어났으니 130주년이다.

허재기(1887~1969)선생의 자호는 호은(湖隱)좌해(左海)이고 김해 김씨로 정절공(貞節公)의 후손이다.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됨을 듣고 3월 20일 구만면 청년들 최정원, 이정수, 문기식, 문상범, 김해수, 우태선, 최정주, 서응엽, 김갑록, 최낙희 등과 함께 시위를 준비하고 향토학자 이종홍에게 독립선언서를 요약해 달라고 했다.

요약본을 필사본으로 만들어 고성군 전역에 전달케 했다. 3월 30일 오후 1시경 국천시장에서 시위하고 최정학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허재기 선생은 공약 3장을 낭독한 다음 배둔 시장으로 진출했다.
중도에 일본 헌병들이 도로를 차단했지만 박차고 진격하고 배둔 장터 일원에서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서찬실, 김갑록, 김동기 등도 시위대를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하니 모두 합해 900여 명이 되었다. 시위 첫날은 시위를 마치고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시위 지도자들 일부는 체포되기도 했으며 엄중한 조사를 받았다.

허재기 선생은 대한독립동맹이란 단체를 만들고 한인 관리들에게 퇴직권고문을 작성해 발송하고 마암면 허종택을 찾아가 군자금을 제공해 줄 것을 호소해 10원을 받는 등 고성군 일원에서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주기도 했다.

고성군 일원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하기도 했다.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3년형이 구형되었으나 불복해 항소하게 된다.

1921년 4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1921년 5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허재기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향리에 허재기 선생의 생가가 향리에 있고 기리는 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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