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속 여인은 귀신이 아니었다
“무덤 속 여인은 귀신이 아니었다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05.2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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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거창둔마리 벽화고분(鈍馬里壁畵古墳)

▲ ‘피리 부는 여인’동실
▲1971년 11월 거창에서는 국내 문화재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거창 지역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 사람이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서 고려시대의 벽화고분를 발견했다는 제보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창의원 원장인 김태순씨, 김원장은 우연히 거창읍내의 한 술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은 어떤 사람들로부터 믿기 어려운 말을 흘려듣게 된다.
“거창 남하면 둔마리 산 어딘가 무덤 속에서 피리부는 귀신을 봤다”는 것이 주 내용. 귀가 번쩍 뜨인 김원장은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이들을 재촉해 그곳으로 갔다. 하지만 현장에는 도굴꾼들이 이미 무덤을 파헤쳐 놓은 상태. 김 원장은 그들이 가르키는 쪽 바위틈을 통해 후레쉬를 비춰본 후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무덤의 각석 사이 좁은 틈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피리를 부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제보자는 이 ‘피리 부는 여인’의 벽화를 ‘귀신’으로 단정했던 것이다.
훗날 알려진 사실로 이 제보자는 적어도 도굴꾼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제보자는 이 도굴 사건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을 전후해 정신 줄을 놓은 상태가 됐다고 한다.
김원장은 피리 부는 여인의 벽화를 목격한 뒤 형용할 수 없는 큰 충격에 빠졌다.
문화재에 관심이 있던 그의 평소 지식으로 미뤄, 고려고분벽화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됐다는 사실이 그랬고, 회화의 사실성이 수백년 세월을 관통한 것으로 보기에는 여느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생생하고 비범했기 때문이었다.
이 벽화고분은 발견 이듬해인 1972년 문화재 관리국의 발굴조사가 진행돼 고려시대 ‘천녀상(天女)과 주악상(奏樂) 그리고 남녀가 혼합된 무용도(舞踊圖)’로 밝혀졌다.
벽화고분의 주인은 고려 초 지방호족의 무덤으로 추정했으며, 동실과 서실, 2개에 각 가로 90㎝, 세로 245㎝, 높이 90㎝의 석실이었다. 내부에는 ‘천녀상과 주악상’이 프레스코 채색화법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71년 향토사학자에 의해 발견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고분벽화는 지금까지 고려시대에 축조된 무덤 가운데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사적 제239호 거창 둔마리 벽화고분이다.
▲기자는 1971년 거창 둔마리 고분벽화가 발견된 이후 꼭 20년만인 1991년 제창병원원장인 김태순씨를 만나 당시 둔마리벽화고분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4월 어느 날 이를 보기위해 거창으로 갔다.
김태순 원장은 지난 2007년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둔마리 금귀봉 벽화고분은 폐쇄돼 있었고 거창박물관에 모형만이 전시돼 있었다.
구본용 거창박물관장은 “모형은 1988년부터 박물관에 전시돼 있었지만 2008년 개보수하면서 새로이 모형관을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거창 박물관 모형관을 둘러보고 남하면 둔마리 고분벽화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읍을 지나 김천 가는 국도 상에서 논 사이로 난 길을 따르면 마을.
입구에 높이 30여m가 되는 고목앞을 지나면 논고둥 같은 집들이 올망졸망하다. 안내판을 따라 마을 안길을 관통한 뒤 승용차 한대가 겨우 갈수 있는 농로를 고불고불 올라가면 시멘트 포장길의 끝이다. 그곳에서 산중턱 토종소나무 숲 사이로 둔마리 벽화고분이 어렴풋이 보인다.

▲벽화고분은 지리적으로 금귀봉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에 꼭 하나의 무덤만이 들어 설수 있는 곳에 온전히 자리 잡고 있다. 고분 양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고, 앞에는 문인석 석물, 왼쪽은 허리춤 위가 파손됐고 오른쪽은 온전하다.
폐쇄된 탓에 전체적인 모습 외엔 다른 것은 볼 수가 없다. 단지 고분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통해 내부의 모습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방형으로 지대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호석(護石)을 올린 뒤 봉토(封土)를 쌓은 방형호석형태라고 한다.
안내판엔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자리이며 벽화고분은 이중의 벽으로 된 돌방 무덤으로 땅을 파서 판석으로 벽을 두른 뒤 그 안에 돌방을 설치한 굴식돌방무덤이다. 서쪽 돌방에는 목관이 있었지만 동쪽 돌방은 도굴로 비어 있었다. 고려시대의 고분 형식과 종교사상 생활상을 보여주는 얼마 되지 않는 귀중한 유적이다. 비슷한 시대와 내용의 벽화고분은 북한 개성시의 공민왕릉과 2000년 밀양에서 발견된 ‘청도박익공묘’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700년전 벽화고분 앞에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상상을 해본다. 폐쇄된 고분 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엇 때문일까.
세상을 떠난 피장자는 ‘피리 부는 여인’과 ‘춤추는 사람들’의 위안을 받으며 편안히 잠들었다/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에게 비애와 공포감의 대상/비통함과 안타까움의 거사 앞에서 산자와 죽은자는 애써 그런 감정들을 현세가 아닌 미륵 도솔의 세계로 승화시키려 했으리라/그래서 이 검고 어두운 작은 공간에 천국을 그렸다/하얀 회칠을 하고 오색의 화려한 색을 입혀 그림을 그렸다./어떤 그림이 좋을까/아무래도 강렬하면서도 여음 있는 피리가 좋을 것이고/때로는 시끌벅적한 장구도 좋았을 것이다/거기에 주악이 빠질수 없었으리라/더욱이 하늘의 선녀나 혹은 아름다운 여인의 몸사위도 필요했을 것이다/그래야만 한많은 세상을 떠난자의 영혼이 편안히 하늘로 갈수 있었을 것이니/죽음의 공포앞에서 죽은자의 영혼을 달램과 동시에 산자의 마음도 추스르는 눈물겨운 행위였을 것이다./어떤가/이 작은 천국이.

기록에도 ‘천녀가 피장자의 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안주하게 하고 축복해주기 위해서’라고 돼 있다.
통상적인 벽화에서 나타나는 12지상이나 사신과는 다른 보다 현실적인 종교화다.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명문이나 출토 유물이 없어 결국 조성연대와 피장자에 대해 확실하게 규명되지는 못했다. 도굴꾼들에 의해 피장자의 모습과 유물 지석 명문 등이 모조리 사라져 이런 사실을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따라 고분벽화가 지니고 있는 역사성을 심도 있게 논의하지 못한 채 학계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다만 도굴꾼들이 급히 도굴하는 과정에서 일부 깨진 고려청자 파편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고분의 형태가 조선시대의 원형과는 달리 방형(方形,사각형)이라는 점을 들어 고려시대 초기 대략 1300년전의 고분벽화라는 사실로만 추정할 뿐이다.
그렇더라도 이 역시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해 아직까지도 도록에는 어느 시대의 것인가에 관한 것은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 궁금증은 고분벽화가 발견되고 사회적인 이슈가 됐음에도 그의 후손들이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다.
구본용 관장은 이에 대해 “후손들이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완전히 이주했거나 아니면 대가 끊어져 방치된 무덤이 아니었겠냐”고 반문했다.
구 관장은 또 “2007년도에 학술대회를 여는 등 재조사를 시도 했으나 문화재청에서 벽화의 훼손을 우려해 더 이상 심도 있는 조사가 진행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2007년 거창문화센터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최규성 상명대 교수는 벽화의 인물의 두발 형태와 복식등으로 미뤄 중국 원대에 조성된 산서성 영락궁 숭양전 감실벽화에 나오는 주악천녀상과 유사한 점을 들어 원나라의 도교문화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고, 심봉근 동아대교수는 밀양 고법리 고분의 비교연구를 통해 조성연대는 고려후기, 피장자는 거창지역의 인물로 추정했다.
1972년 벽화 촬영비화도 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벽화를 촬영할 수 있는 장비와 기술이 없어 일본에서 전문가 이야마씨를 초빙했는데 무덤 내부가 좁은 관계로 작업이 어려워 12시간이나 소요됐다”고 했다. 특히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림 일부를 촬영하기위해 적외선 특수촬영을 했다”고 전했다.
▲돌아오는 길, 마을 어귀에서 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혹시 고분벽화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느냐는 우문에 할머니는 한참 머뭇거리더니 “어릴 적부터 이 무덤을 봐 왔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한씨의 무덤일 것이다”고 말했다. 구관장에게 확인한 결과, 신빙성 있는 대답이 아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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