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조선 여인 잔혹사(Ⅱ)
칼럼-조선 여인 잔혹사(Ⅱ)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2.19 18:1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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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조선 여인 잔혹사(Ⅱ)


조선시대에는 남편이 역모에 연루되면 여자들은 관노(官奴)로 보내지거나 공신들의 노비로 하사되었다. 수양대군이 정난을 일으켰을 때 쟁쟁한 명문대가의 부인들과 딸들이 공신과 왕실의 노비로 하사되었다. 신숙주는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를 노비로 달라고 청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평민 여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귀한 신분인 왕실이나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아닌 상민들, 소위 평민 여성들은 사실상 일에 파묻혀 살았다. 특별히 산아제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7∼8명씩 낳아 키우면서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베틀에 앉아서 옷감을 짜고, 식구들의 옷을 손수 짓거나 빨래를 하고 밥을 해야 했다. 평안도 만포(滿浦) 첨사 전태현은 그곳 기생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관불(關不)’이라고 지었다. 기생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으면 기생을 첩으로 삼기 전에는 입적시키지 않았다. 딸은 어머니가 기생이니 당연히 기생의 신분이 되었는데 미모가 뛰어나서 뭇 남성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첨사가 관불에게 수청을 들라고 명을 했는데 “아버지가 양반인데 내가 어떻게 가문에 부끄러운 짓을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거절을 하자 온갖 방법으로 회유하고 위협을 하니 거절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관아 뒤의 바위에 손가락을 깨물어 다음과 같은 혈서를 남기고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전관불 수투사(全關不 水投死): 전관불은 물에 빠져 죽는다. 기생을 단순하게 쾌락의 도구로만 여겼던 조선시대 양반들의 비정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태종 때 양반가의 여인 유녀(柳女)는 결혼한 몸으로 첫사랑 조서로를 다시 만나 불륜을 범한 사실이 알려지자 간음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형을 당하고 남자는 공신의 아들이라 하여 유배만 가고 말았다. 정조시대 황해도 봉산(鳳山)땅에 봉금(鳳今)이라는 여종은 돈을 내고 양인이 되었으나 옛날에 모시던 상전에게 문병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몽둥이로 맞아 죽었으나 기득권층은 상전과 종의 의리라는 궁색한 명분을 내세워 양반은 가벼운 처벌을 받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숙종 때 경북 선산에 사는 박자신(朴自新)의 딸 항랑은 어릴 때 생모를 여의고 계모의 손에서 심하게 학대를 당하면서 자라다가 17세 때 인근 마을의 14세의 소년 임칠봉(林七鳳)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의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맞아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싸늘한 박대를 받고 다시 시가로 갔으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기 전에 지어 불렀다는 ‘산유화’라는 노래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 천지가 비록 크다 하나, 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 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 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

조선시대에 시어머니에게 반발하는 것은 불효이고 남편에게 대드는 것은 불공(不恭)이었다. 왜 조선은 선비들의 나라이고 남자들의 나라여야 하는가? 조선은 신분제도가 철저하게 정착화 되어 있던 나라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일부종신(一夫終身), 일부종사(一夫從事),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여성들의 삶을 굵은 동아줄로 꽁꽁 묶어버린 사슬이고 굴레였다.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유교는 이 땅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다. 그의 학문의 중심사상인 충(忠)‧효(孝)‧예(禮) 사상은 여성의 자존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자보다 더욱 완고했다.

세상은 변하고 변하여 요즘은 서방 있는 년들이 쌍판때기 쳐들고 로맨스를 즐긴다고 하면서 외간남자를 끼고 모텔을 드나드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시집한 번 가지도 못했던 비첩들이 환생이나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 간통죄가 없어지고 모텔들이 성업을 이루고 있는 이 현상을 조선시대 선비라카는 그들이 오늘에 다시 태어나서 본다면 ‘말세로다’라고 할 것이며 조선시대 여인네들이 본다면 그네들이 살았던 그 때를 ‘말세로다’라고 한탄 했을 것이다. 이 글의 명제를 ‘고통사’‧ ‘수난사’‧‘참혹사’‧‘애환사’라고 할까 하다가 ‘잔혹사’로 결정했다. 여인을 존엄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하는 것과 여인에게 물들어 버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성희롱 했다는 높은 남성들이여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님을 유념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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