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고유한 전통과 정신 핏줄 타고 흐른다
(6)고유한 전통과 정신 핏줄 타고 흐른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19 13:54
  • 댓글 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동의 별 강이식 장군, 남명 조식, 그리고 천강 홍의 장군 이후(하)

▲ 홍의장군 곽재우
망우당(忘憂堂) 곽재우는 곽월(郭越, 황해도관찰사 역임)을 아버지로, 진주 강씨(晉州姜氏)를 어머니로 1552년 의령(宜寧) 에서 출생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보다 7세 연하, 충무공인 김시민 장군보다는 2세 연상이며, 의병장 곽재우를 평생 두렵고 껄끄럽게 생각한 선조와는 동갑이다. 158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에 선조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에 임관되자마자 파직되었다. 7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곽재우(郭再祐)는 22일 조선에서 제일 먼저 기병 하였다.

불과 며칠 뒤인 5월 초에는 함안군을 수복하고 5월 24일 정암진(鼎巖津:)전투를 벌인다. 곽재우와 50명의 의병은 일본군 6부대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휘하의 안코쿠지 에케이가 지휘하는 2,000명의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니 조선 최초의 의병 승리 전으로 기록된다. 
 
군량미는 가장 중요한 전투 수행 물자이다. 오죽하면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 전라도가 없다면 나라도 없다.)’라고 했을까.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일본 해군의 서해진출을 틀어막았고, 곽재우 장군의 정암진 전투를 시발로 한 1, 2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 육군의 전라도 진격을 끝까지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곧 조선을 손에 넣을 줄 알았기에 여름 무장과 몇 달간의 군량미만을 지참한 일본군은 허기와, 허기보다도 더 무섭다는 조선의 동장군의 위세로 장기전으로 묶이고 결국 패퇴 하게 된다.

초전승리의 곽재우 의병 부대는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도움으로 의령, 삼가 두 현을 곽재우의 지휘 아래에 편입시켜 1천 병력이 되었고, 전 목사 오운과 박사제의 3천명의 병력까지 합세, 총 4천명의 병력이 되었다. 곽재우 장군은 1차 진주성전투에 휘하의 병사들을 보내어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승리하는데 조력한다.

임진왜란의 중요한 주역은 관군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무공 김시민 장군, 김천일 장군, 최경희 장군 중 유일한 의병장인 충익공 곽재우장군의 역할과 논개 등 민초들의 호국 의병정신이었다. 그들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이식 장군으로부터 물려받은 주체, 호의, 평등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 한 것이다.

장군은 늘 붉은 옷을 입고 선두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하늘이 내린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고도 불리우면서 거칠 것 없었던 일본 육군에게는 유일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관직제수를 거부하고 낙향을 거듭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이 죄 없이 잡혀 생사를 넘나들다가 백의종군의 치욕을 당하고, 절친한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대역죄로 죽는 등, 선조와 조정의 혼미함에 더 이상 관직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았으니 스승인 남명 조식선생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낙향 시에는 주로 산중에 은거하면서 솔잎으로 생식을 하는 등, 선도수련(仙道修練)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러한 선조들의 분투에도 결국 백 년 전에는 일본에게 나라를 잃고, 또다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의병 활동을 이어 갔다.

그중에도 안중근의사, 윤봉길(尹奉吉)의사와 함께 3의사(義士)로 추앙 받고 있는 강우규(曰愚 姜宇奎) 의사 또한 진주 강씨이다. 강 의사는 1919년 9월 2일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도(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 관료 등 37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65세라는 나이에도 일신을 돌아보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단독 거사했으며 체포된 후에도 의연하고 당당하게 일제와 맞선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의 상징이시다.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음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것이다." 라면서 다음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신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斷頭臺上), 오히려 찬바람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한 가닥 감회가 없으리오(豈無感想)안중근의사의 이등박문 저격 후 10년, 윤봉길의사 의거가 있기 13년 전의 대표적인 국내 거사이므로 독립운동의 맥락을 이어가는 매우 중요한 의거이다.

의혈 독립 운동가들의 요람인 간도 땅 요동은 고구려의 강이식 장군들의 다물(多勿)의 활동무대이었고 발해를 세운 대조영 선조의 마음에 따라 발해만이 태어났다. 진주 강씨(晉州 姜氏)는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구국공신 병마도 원수공 강이식(姜以式) 장군(將軍)을 단일(單一)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고려의 귀주대첩의 명장 강감찬 장군과 은열공 강민첨(殷烈公 姜民瞻) 장군(將軍)도 진주 강씨이고 문인으로는 강사상(姜士尙), 강국흥(姜國興) 등이 있어 구국의 문, 무 충신들이 많다.

강이식 시조로 부터 천 삼백여 년 후,  21세기를 맞아 발해 만에 대한민국의 STX 다롄 조선 생산기지가 건설되었다. 해외 거점을 중심으로 '글로벌 톱 조선그룹'으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공표한 STX 그룹의 대표도 강이식 장군의 후예인 줄로 안다. 
 
세계는 교역상품에 의하여 점차 국경은 무너지고 경계는 흐려지고 있으나 경영자에게는 가문이 있고 국적이 있어 그 고유한 전통과 정신이 핏줄을 타고 흐르고 있다.
정부는 2010년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거병한 날인 6월 1일을 국가지정 ‘의병의 날’ 로 정하여 매년 의병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제 정부와 국민은 다 같이 고구려의 영광, 그 뜻을 이은 해동성국발해(海東盛國渤海) 의 ‘다물’의 꿈을 다시 한 번 이어 받자. 그리하여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영원한 한류의 컨텐츠를 전 세계로 적극 수출하자.

그 중심에 진주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지 않은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나는야 2011-07-01 13:41:34
아~ 이런 좋은 글이....

창원인 2011-06-25 01:50:18
캬~ 멋집니다^^

순신장군 2011-06-25 00:22:33
가슴의 열정을 깨워주는 기사네요. 감사합니다 ^^

한사랑 2011-06-24 16:41:18
홍익인간 이화세계 정말 멋진 나라입니다.그 세계를 위해 끝까지

샤방 2011-06-24 15:09:37
홍익정신 우리가 반드시 이어나가야할 정신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