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추억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 그립다
기고-추억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 그립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3.07 18:3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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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합천수필가
 

이호석/합천수필가-추억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 그립다


사람은 누구나 추억이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 살아온 환경에 따라 추억도 다 다를 것이다. 가끔, 나의 추억에 남겨 놓고 가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먼저 부모님과 형제들이 많은 추억을 만들어 놓고 내 곁을 떠나버렸다. 내가 어릴 적, 보릿고개 시절의 가난 속에서 눈물겹도록 힘들게 살아가던 모습들이 오랜 세월에 차츰 흐릿해지면서 간혹 떠오른다. 아버지는 산 너머에서 봄이 오는 낌새가 있으면 제일 먼저 집 주위 양지바른 텃밭에 짚으로 너덧 평 남짓한 온상을 만들었다.

그 안에 씨 고구마를 묻고 고추, 토마토, 가지 씨 등을 심었다. 어설피 만든 온상 비닐 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며, 물을 주고 온도를 살펴보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씨앗을 넣고 며칠 지나면 온상 안에는 연둣빛 새싹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고, 금방 초록의 새싹들로 가득 찬다. 고구마 싹이 어느 정도 크면 가위로 잘라 우선 가식을 하고, 다른 모종들은 그동안 갈고 다듬어 놓은 논밭으로 하나하나 옮겨 심는다.

마을 어른들은 정월이면 꽹과리를 치며 집집을 들러 집신 밟기를 하고 그네뛰기, 윷놀이 등으로 가난과 힘든 농사일로 찌든 마음을 잠시나마 위로한다. 그리고 칠월 칠석과 백중이 있는 여름에는 가끔 참외 수박밭으로 서리(당시는 사먹으려 가는 것도 서리라 하였음)를 가기도 한다. 그런데 겨울철 농한기가 되면 농촌 마을에는 좋지 못한 풍토가 있다. 화투노름이 심하였다. 노름으로 가을에 추수한 넉넉지 않은 곡식을 내다 팔기도 하고, 심하게는 논밭을 파는 사람도 있어 온 마을이 뒤숭숭했다.

청소년들은 겨울철이 되면 뒷동산의 나무를 베다가 썰매와 송곳을 만들고, 응달의 개울을 찾아다니며 썰매를 탔다. 또 온갖 종이를 찾아 딱지를 만들었고, 유리구슬과 함께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또래들과 따먹기를 한다. 그리고 서툰 솜씨로 연을 만들어 띄우기도 하고, 나무로 만든 자치기와 팽이 돌리기로 겨울의 짧은 해가 아쉽기만 했다.

이외도 우리 일상에서 그동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이 너무나 많다. 농촌 부잣집의 상징이었던 마당의 곡식 저장고 두지와 집채같이 쌓아두는 땔감 나무 더미가 없어졌고, 초가집과 아궁이가 있는 부엌, 장독대, 굴뚝이 거의 없어졌다. 또 농가 재산목록 1, 2호로 꼽히며 집집이 한두 마리씩 기르던 소와 돼지, 농부의 의관이라던 지게, 논밭을 가는 훌챙이와 쟁기, 짚 소쿠리, 채 소쿠리, 나무 당거래, 짚으로 만든 덕석과 방석, 소여물을 써는 작두와 소 먹이통 구시, 석유 등잔, 라디오, 재봉틀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생활용품이 사라졌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추억 속으로 사라진 반면, 변하고 새로 등장한 것도 많다. 지금은 봄채소 심을 철이 돼도 온상을 만들어 모종을 기르는 농가는 거의 없다. 모두 시장에서 모종을 사다 심는다. 그리고 힘 더는 농사일은 모두 기계가 한다. 청소년들은 아예 흙에서 뛰놀지도 않는다. 공부에 목을 매지만, 조금이라도 여가가 나면 컴퓨터나 스마트 폰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농가에 새로 나타난 것들도 많다. 집집이 늘어선 자가용 차량, 냉장고, 에어컨, 경운기, 트랙터, 농사용 동력 살분무기, 텔레비전, 개인용 스마트 폰, 개량 부엌과 가스레인지 등이 있다.

그동안 사라진 것 대부분이 친환경적인 것들인데 비해, 새로 등장한 것 대부분은 쇠붙이로 만들어진 기계들이다. 이렇게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심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항상 슬픔과 즐거움을 이웃과 함께하며 한 식구 같이 정겹게 살았다. 지금은 모든 게 기계화로 편리하고, 3만 불 시대 국민답게 삶도 윤택해졌지만, 이기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인심은 기계의 쇠붙이처럼 싸늘하고 온기가 없다.

필자는 가끔, 모든 게 부족하여 허덕이던 환경 속에서도 정이 넘쳐흐르던 그 시절의 삶과 경제적 물질적 풍요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할 게 없는 지금의 삶 중, 어느 삶이 행복한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추억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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