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투사 장덕익(張德翼)
진주성-항일투사 장덕익(張德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3.28 18:0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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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항일투사 장덕익(張德翼)


장덕익(1889~1942)선생은 진주3.1운동 지도자로 독립선언서, 태극기,교유문을 배포하고 시위군중을 지도한 분이다.

장덕익 선생은 기독교계통의 광림학교 출신이고 한규상 선생의 후손들 끼리 1980년대 까지 교분이 있었다고 말한다. 장덕익 선생의 호적은 1945년 전후에 혼란기에 불타고 없어져 그 후 되살리지 못했다. 다만 인동장씨 호적을 통하여 생몰년월일과 기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79년도에 발행한 《부산경남3.1운동사》에는 1891년 7월 6일생으로 기록되었고 경찰청지문기록에는 1889년 8월 19일로 기록되어 서로 다르다.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한《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1889년이라고 기록했고 생년월일을 밝히지 않았다.

1919년 3월 10일 진주의 거리에는 “왜 삼남에는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격문이 나붙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으로 광림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 심두섭, 한규상, 이영규, 천명옥, 김장환, 박성오, 김영조 등이 행진용으로 나팔과 큰 북, 작은 북을 준비토록 하고 신호용으로 교회 종을 치도록 했으나 나팔은 3월 18일 사용하지 못하고 교회 종은 5곳에서 일시에 일어나기 위해 종을 치도록 의논했다.

일경에 잡힌 장덕익 선생은 진주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11월경 50세 전후에 세상을 떠날 것 같은 병세를 보였다. 후손들이 남기고 싶은 말씀이 계신가라고 말했으나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다”라고 말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 온다.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게 되는데 후손들이 기록물 찾는 것을 하지 못해 필자가 도와주었고 공적서. 이력서. 신청서 역시 필자가 작성하고 제출해 성사시켰다.

장덕익 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 금산면에 진주진양항일투사추모비를 세워 다음과 같이 깊이 새겨 두었다.

-진주3·1운동 지도하고 체포되어 1년형 옥고한 장덕익-

별세 후 진주시 이현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표지석을 세우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국립묘지로 안장하지 못하고 있다. 1994년에 공동묘지 입구에 작은 비석을 세워 두었으나 그 조차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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