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익점 선생의 애민정신을 생각하며
기고-문익점 선생의 애민정신을 생각하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4.03 18:4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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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문/국립산청호국원 현충과
 

이병문/국립산청호국원 현충과-문익점 선생의 애민정신을 생각하며


요즘 공직자의 부패로 신문 사회1면을 장식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공직자의 청렴과 국민들을 위해 일하는 자세가 언제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역사 속의 공직자 중 개인의 이윤보다도 국민을 먼저 생각하신 분 중 대표적인 인물로 문익점선생을 들 수 있다.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자.

문익점 선생은 1329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하여 1360년 계품사로 원나라에 파견된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기록관)으로 중국을 방문해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면의 씨앗을 붓통에 10개를 넣어서 들어왔다.

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점은 1364년 고향인 현재 경남 산청군 단성면으로 내려와서 장인이신 정천익과 목면 씨앗 5개씩 나누어 재배하였고 본인은 모두 실패했으나 장인인 정천익의 5개 씨앗 중 1개가 꽃을 맺고 재배에 성공해 100개의 씨앗을 얻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생산된 목면을 직조하는 기술까지 연구 개발에 매진하여 대량화에 성공한다.

선생은 이 기술로 개인적 사익을 챙기는 게 아니라 헐벗은 백성을 걱정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백성들은 삼베옷을 입었다. 여름에는 통풍이 잘 되어 시원하다고 하지만, 한 겨울에 베옷을 입고 지내야 하는 고통은 ‘헐벗은 고통’ 바로 그것이었다. 선생이 널리 존경받게 된 큰 이유는 이렇게 ‘헐벗었던’백성들의 의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나라를 부국하게 하였다. 세종 때에는 면포 한필이 쌀 두말 가격이었다. 예컨대 여진과의 거래에서는 상등 말 한필에 면포 40필로 거래 되었고 일본과는 은, 동, 소목 등과 거래하였다. 성종 때는 일본으로 가는 면포 수출량은 약 50만필에 달했다.

면포는 동북아시아 무역질서에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세종은 ‘부민후(富民候)’, 즉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이로 추증토록 했다. 이에 반해, 목면 재배에 번번히 실패해서, 조선에서 비싼 금액으로 면포를 수입해서 사용하던 일본은 큰 부담이었다.

이에 목면재배에 성공만 하면 큰 부를 누릴수 있다고 생각했던 토요타 사키치는 조선에서 목면 씨앗을 일본으로 가져가서 목면 대량 생산을 성공한다. 토요타 사키치는 독점적인 목면 판매로 부를 축적하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토요타 자동차의 전신인 토요타자동직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면포 생산의 근현대화에 성공하여 지금은 연 매출 180조에 이르는 토요타자동차를 만들었다.

위에 열거한 두 명은 자기 나라에서 최초의 면목재배에 성공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성공 후의 행적은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정신과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심, 청렴한 자세 등 문익점 선생의 정신은 사후 600년이 지난 현재의 공직자가 꼭 배워야 할 덕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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