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비목(碑木)
가곡 비목(碑木)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3.12 1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기식/진주 상봉동동 문화위원
강원도 화천의 백암산 한국전쟁터 산과 강에는 온통 전쟁의 잔해(殘骸)와 흔적(痕迹)들, 벌거숭이 비탈에는 수통과 탄피, 철모가 나뒹굴고 화목(火木)용 땔감은 파편 투성이였다. 골짜기엔 소총 실탄들이 무더기로 묻혀있고 강변둔덕에는 포탄 껍데기가 패총처럼 쌓여 있었으며 간이 무덤같은 돌무지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고 채소를 심으려고 삽질을 하면 유골이 나오기 일쑤였다.

남방 한계선은 고작 푯말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고 군사 분계선이라곤 녹슨 철조망 한 두 가닥씩 풀 속에 깔려 있었다. 공비들의 수류탄 투척을 막기위해 지붕위에 철망을 쳤다. 군인들은 밤에도 군화를 신은채로 잠을 잔다. 군사 분계선은 대자연의 경의(更衣)로움 그대로였다. 봄이면 선명한 등고선을 그으며 성큼성큼 위로 차오르는 신록(新綠)의 조화, 가을이면 단풍의 물결이 하강(下降)하는 자연의 변모도 진기(珍奇)했다. 궁노루(사향노루) 울어예는 교교(皎皎)한 달밤의 전경도 감탄과 신이(神異) 그 자체였다. 예(여기)의 궁노루 우는 달밤이였다. 돌무더기 앞에 팻말 비슷한 나무가 썩어 드러누워 있고 탄피며 철모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이를 따라 하얀 산목련이 달빛 속에 우뚝섰네, 예사롭지 않은 사연임을 직감했다. 산화(散華)한 연인의 무덤가를 지켜주는 가련한 여인의 소복한 화신(化身), 긴 세월을 기다리다 지친 순애보의 아낙이 돌아오지 않은 낭군의 차디찬 무덤가를 지켜주는 물망초(勿忘草), 망부석(望夫石), 그 날의 감흥(感興)을 훗날 비목이라는 가사로 엮었다.

“초연(憔然)히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 먼 고향 초동(樵童)친구 두고 온 하늘가 /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비목이여 /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닳어 /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은 목비를 시적(詩的) 언어로 표현한 단어이다. 비목은 1968년 방송국 음악 PD로 일하던 한명희씨가 작사하고 장일남이 곡을 붙였다. 6·25 비극을 일깨워 주는 대표적인 우리 가곡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 자유 양대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는 내포한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 냉전인 동시에 국부 및 전면전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으며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 중 하나였다.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33만여 명의 사상자, 20만 명의 전쟁미망인, 10만명의 전쟁고아, 가옥파괴, 공업시설 가동불능, 경제적 사회적으로 암흑기를 초래했다. 전쟁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된 온갖 외국풍조는 전쟁이라는 악 조건속에서 잘못 소화되어 극심한 윤리적 타락을 낳았으니 이 극악의 사태를 극복하는 일은 평화를 애호하는 자유진영의 공동과제로 제기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