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무주구천동 나제통문
진주성-무주구천동 나제통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4.17 18:3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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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무주구천동 나제통문


1898년 미수 허목(1595-1682)은 남쪽 명산 가운데 최고는 덕유산인데 능선에 내린 안개와 노을이 인상적이라 하였고 300리나 뻗쳐있다고 덕유산에 대한 찬미하였다. 산해(山海)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소백산맥의 주맥에서 중간지점에 위치한 덕유산은 작은 지리산이라 불릴만큼 그 산세나 형태가 비슷하다.

전쟁과 평화의 헌적 300리 노을이 사람들은 부른다. 덕이 있고 너그러운 땅이라 덕유산(德裕山)이라 했다. 남도의 동서를 가르는 산 이름과 달리 산을 차지하려는 전란도 많았다.

덕유산 자락에는 구천동이 있다.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았다고 구천동이라는 말이 있고 성불한 불자가 9000명이라 해서 구천동이 됐다는 구전도 있다. 구와천은 많다는 뜻이고 굽이가 험하고 깊은 골짜기라는 말도 된다. 구천동에는 33경이 있다. 제1경은 나제통문(羅濟通門)이고 33경은 향적봉이다.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 석모산 아래 뚫린 암굴이다. 이굴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국경 출입소였다. 통문 앞 다리아래 설천에는 작은 소(沼)가 있다. 이곳에서는 ‘파리소’라 부른다. 전투를 벌리다 죽은 신라와 백제 병사들 시체위로 파리떼가 들끓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바위에 이를 한자로 적은 승소(蠅沼) 두글자가 새겨져 있다.

나제통문은 1914년 일제강점기 무주 광산 개발을 위해 뚫은 임시터널이다. 터널을 진입하는 30번국도는 1925년 건설된 신작로이다. 나제통문이라는 이름은 1963년 관광지 개발을 위해 뚫은 도로 터널이다.

이 굴로부터 동쪽으로 경상도 땅 경계까지는 30번 국도로 15Km거리 덕산재를 넘어야 한다. 삼국통일전 국경이 이 통문이었다. 바위에 커다랗게 새겨진 한자로 승소가 아닌 학담(鶴潭)이다. 옛날 신라와 백제 국경이니 당시 기록이 1000여년이 지나자 굴 동·서쪽 백성들은 풍속과 관습에 차이가 많이 있다. 구천동 33경을 주도한 사람은 김남관이다. 당시 육군 대령이었다. 구천동 계곡에 매혹되 고향 무주를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내고 절경을 골라낸 사람이었다. 구천동 초입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가 서있다. 33군데나 되는 절경 경치 인플레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 절경지를 선정하고 길을 낸 그 마음 덕분에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향적봉 붉은 노을 삼백리를 쉽사리 즐기게 되었다. 대신 칠연계곡 칠연의총은 반드시 가보아야 한다. 일제강점기인 1908년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순국한 의병들을 기리는 공간이다. 1962년 향토예비군이 유해를 수습 만든 집단분묘가 거기있다. 꼭 가보아야 한다. 아름다움 속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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