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투사 화진선
진주성-항일투사 화진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4.25 18:5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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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항일투사 화진선


화진선(化進善)선생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에서 태어난 것 같은데 또 진주 대곡면, 산청 단성면 지역과 상당한 관련을 가진다.

부친은 화재식(化在式)이며 모친은 인동 장씨로 두 분의 슬하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기 1889년 3월 15일생이란 기록이 있고 일부 기록에는 1890년 3월 15일 이란 기록도 있어 혼돈을 준다.

진양화씨세보에 의하면 조선 성종 때 귀화한 경성군(慶城君) 화명신(化明臣)을 원조로 하고 임진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우고 공신 반열에 드신 화섭(化燮)장군이 중시조이라고 한다.

직계 후손들과 일족이 명석면 일대에 살고 있으며 장군 묘지를 중심으로 수천 평의 토지(산)를 소유함은 공신녹권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한다.

화진선 선생은 1921년 군자금을 수합해 임시정부를 위해 군자금을 모아 보내기도 했으며 증산교 계통의 영향을 받아 청암면장 화창조를 찾아가 장차 황제가 등극하면 군수, 도지사가 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하동, 사천, 산청 일대에서 활동하다 일경에 발각, 체포되었다.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는데 일본의 황제가 곧 조선의 황제인데 새 황제를 맞이하여 새 관직을 가질 수 있다고 선전함은 반역이라고 하면서 더 심한 고문을 받고 혼절했다.

1921년 6월 18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제령 7호 위반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화진선 선생을 잘 아는 향리 원로에 의하면 하나를 보면 백을 통하는 분이었으며 프랑스, 중국어, 일본어, 몽고어 등 5개국을 구사한 분이었다고 말한다.

진주 향교에 전교였다고 전하는 분도 있다.

1945년 광복을 보지 못하고 만 53세에 세상을 떠났다. 경주 최씨와 혼인해 화유전(진주 평안동 교회 앞 태광라사), 화순자(경기도 거주)1남 1녀가 있다.

손자들은 2남 1녀가 있는데 화종영은 합천군청 주사로 근무 중이고 2남 화대원은 경기도 지역에서 연세치과 원장으로 근무 중이다.

유일한 손녀 화은란(은행원)이 있다. 이 모든 좋은 결과는 필자가 협력하고 도우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음을 밝혀 둔다.

지금까지 공적비 또는 기념비 조차 세워지지 않음은 어쩐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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