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3·1운동의 진실
진주 3·1운동의 진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3.1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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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경화/항토사학자
진주 3·1운동은 93년전 고종황제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산에 참여한 김재화, 심두섭, 조웅래, 박대업, 정용길 선생 등이 서울 3.1만세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감화·감동을 받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입수해 진주로 귀향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재화 선생의 자택에서 먼저 모여 논의 후 3월 10일 새벽시간에 시내 각처에 ‘왜 삼남에는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격문을 붙였다.

시위 날자를 3월 18일 화요일 정오 12시로 정하고 여러 장소에서 투쟁하기로 하다 보니 신호용 종이 필요했다.

고등경찰이 상부에 보고한 문서를 모아 편집한 ‘고등경찰관계적록’ 10면에 ‘배일사상을 가진 박진환, 이강우, 강대창, 강상호, 박용근 등의 수모자들이 3월 18일 진주 예수교 예배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기하여 앞에서 진행하고 진주강변을 거쳐 본성동으로 일제히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소요를 일으켰다’라고 기록했다.

그 당시 주요부서가 모인 도청소재지의 고등경찰이 상부에 보고하면서 나팔소리로 시위가 전개된 것을 숨기고 종소리가 신호용이라고 보고했다면 징계대상이었다.

그 당시 진주읍내 인구는 2만 명 정도로 누구든지 종소리 또는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기 때문에 종소리가 신호용이라고 허위 보고하겠는가.

해방 후 관청에서 편찬한 최초의 기록인 ‘경상남도지’가 1959년에 발간되었고 저자는 항일투사 이기주 선생이다.

800면에 보면 ‘교회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었으니 정의의 종소리며 독립의 우렁찬 소리’라고 기록했다.
진주 3·1운동 지도자로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복음병원장·한일병원장 한규상 선생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교회’ 52면과 136면에 보면 ‘행동개시의 정오가 되자 봉래동 예수교회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시내 5구역에서 대기한 농지들이 출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라고 기술했다.

그보다 확실한 근거는 대국복심법원 판결문이다. 악대원과 악기가 동원된 시기는 ‘3월 19일 오전 11시경이며 큰 북과 나팔을 불며 시위행진을 계속하여’라고 기재돼 있다.

또 다른 결정적 근거는 대구교도소 집행지휘서와 개인 신분가드로 정성호, 이영규 등에 대하여 ‘피고는 3월 19일 오전 11시경에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진주 대안동과 평안동 노상에서 대고(큰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을 외쳐 치안을 방해했다’라고 명확히 기록돼 있다.

기생독립단이 나타나 강변을 따라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주동자 6, 7명이 체포되어 유지장에 감금됐고 걸인독립단이 나타나 우리가 걸식함은 일제의 만행때문이라고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고 노동독립단이 출현해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시위도중 제봉틀 기술자가 현장에서 죽고 시위 지도자 24명중에 김재화, 권채근 선생 등이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했다.

진주 3·1운동은 당시의 기록과 재판기록 그리고 교도소 기록을 근거로 한다.

앞서 기록을 보면 진주 3·1운동은 3월 18일 12시경에 교회 종소리에 따라 다섯 장소에서 2만여 명이 다같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고 나팔은 다음 날 19일 11시에 노상에서 울렸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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