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나그네 머물던 사랑채
진주성-나그네 머물던 사랑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5.29 19:2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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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나그네 머물던 사랑채


옛날 사람들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가거나 여행을 할 때 주로 어디서 머물렀을 까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묵어가도 괜찮을까 주인에게 여쭈어 보거라” 초라한 행색의 나그네가 어느 기와집 대문 앞에서 그집 하인에게 한 말이다.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여행을 떠날 일이 많지 않았다. 먼 길을 나서 다른 곳에서 숙박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거나 일정한 거처없이 떠돌아다니며 기예(技藝)를 보여주는 사람들 이름난 산과 계곡 등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다니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선비들이었다. 여행길에 나선 나그네들이 낯선 지역에서 숙박을 한 곳은 양반집의 사랑채라는 곳 사랑채는 집의 구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은 대문옆에 붙어있는 하인들의 행랑채 뒤에 독립적인 건물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부분 나그네가 묵어가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그네를 통해 다른지역 소식과 최신 정보를 듣기도 했다. 그들을 홀대했을 때 혹시나 지역에서 자기에 대한 평판이 나쁘게 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에 또 멀리서 온 손님을 잘 접대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고 여겼다.

서민들이 묵어가는 시설로는 주막이 있다. 일정한 거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객들이 이곳에서 묵었고 주막은 술, 음식도 팔고 잠도 재워주는 곳으로 장터나 큰 마을에도 많아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조선시대 수많은 나그네가 드나들어 이름난 양반집 사랑채로는 ① 열화당(悅話堂)은 강원도 강릉 선교장(船橋莊)의 사랑채 이름으로 “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는 뜻이다. 세종대왕의 형이자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11대손 이내번과 그 후손들이 생활한 집이다. 1815년에 지었다.

② 전남 해남에 있는 녹우당(綠雨堂)은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가 살았던 집의 사랑채로 효종임금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을 뜯어 해남으로 옮겨온 것이다. 초록비가 내린다는 녹우당 ③운조루(雲鳥樓) 전남 구례 오미리에 있는 류씨 가문의 큰 사랑채 누마루이다. ‘구름 속 새처럼 숨어 있는 집’이라는 뜻 영조때 류이주란 인물이 낙안군수로 있을 때 지은 집으로 선교장처럼 규모가 매우 큰 99칸 양반집이었다. 노년을 편안하게 지낸다는 뜻의 노안당(老安堂)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집이었던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이 주로 거처했던 곳 원래 운현궁은 창덕궁 건너편에 있는 규모가 작은 집이다. 나랏일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치 사랑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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