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투사 박봉제(朴奉濟)
진주성-항일투사 박봉제(朴奉濟)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5.30 18:5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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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항일투사 박봉제(朴奉濟)


이명 : 박윤호(朴允浩)

박봉제 선생은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출신으로 1897년 12월 26일생이다.

진주 장날인 1919년 3월 18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박봉제 선생은 그날 밤 우리 면민도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애국청년들을 모아 각 조직을 만드니 비밀결사 명칭을 독립의우회라고 정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로 결의하고 20일 밤을 틈타 시위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3월 20일 밤 미천면 동매리 마을 앞에는 독립의우회원 13명과 주민 7백여 명이 운집하였다. 7백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의우회원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주민들은 복창하여 미천면 일대가 천지가 진동하는 것처럼 요란하였다.

이 때 박봉제 선생은 스스로 두루마기를 찢어 즉석에서 ‘대한독립’이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앞에 세우고 군중을 지도하여 일제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군중이 안간리 방면으로 가자고 요구했으나 밤이 깊었으므로 귀가하자는 의견도 있어 해산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경찰이 나타나 주모자들을 잡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노기주, 김윤권 등은 일경에 잡혀 끌려갔다는 말을 듣자 체포를 면하기 위해 가매(家妹)가 살고 있던 산청군 황매산으로 도피하였다. 황매산까지 피신하여 천연동굴에 숨어들어 약 5년간 숨어 지냈다. 5년간 인걸동굴에서 숨어 지낸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1927년 3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을 찾으라는 말과 같이 이름을 바꾸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복정시에 거주하면서 일본형사를 매수하여 서장직인을 만들어 도항증명서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 증명서를 이용해 조선인 몇 명을 복정시에 오게한 후 항일운동을 전개키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하였다. 1939년 2월경 귀향하여 요양과 치료를 받았으나 고문후유증이 심하여 백약이 무효였다. 1939년 5월 한창 일할 나이 만43세에 세상을 떠났다.

박봉제 선생의 아들 박동환 님께서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진주시 금산면에 세운 진주항일투사추모비 건립을 지도‧후원하고 2008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손자 박정배, 박술용, 박돈주 등이 선조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미천면 초등학교 정문 옆에 만세비와 박봉제 선생 공적비가 건립되어 오가는 이들의 발을 멈추게 한다.

진주항일투사추모비에 박봉제선생의 공적과 성명을 다음과 같이 새겨 두었다.

‘美川面3·1運動主導者로 獨立艤友會를 組織한 會長. 7百名을 指導한 朴奉濟(允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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