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마음의 칼
칼럼-마음의 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6.18 18:3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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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마음의 칼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라는 표현이 있다. 말을 칼에 비유한 표현이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말이 상대방에게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때로는 손에 든 칼 보다 마음에 품은 칼이 더 위험하고 잔인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신구의삼업(身口意三業)’이란 가르침이 있다. 신(身)은 몸으로 하는 행동, 구(口)는 말로 하는 모든 것, 의(意)는 의도 즉 가슴속에 품은 뜻을 말한다. 이것이 세 가지 행위라는 것이다. 업(業)이란 까르마(karma)를 번역한 말인데, 까르마의 본래 의미는 ‘행위’와 ‘행동’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내가 한 행위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여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곧 업(까르마)이다. 몸으로 하는 나쁜 행동은 누구나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말로 남을 비방하거나, 욕하거나, 저주하는 것은 모두 그 잘못이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도라는 것은 몸이나 말로 표출되지 않는 것이기에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의도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알아보기란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 가지 가운데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왜냐하면 의도가 신체적 행위와 말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업이 의도가 짓는 업이라고 한다. ‘법구비유경’에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설해져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평범한 사문(沙門)의 모습을 하고 사위성에 사는 인색하고 흉악하며, 도덕을 믿지 않는 부부를 교화하고자 찾아가게 된다. 마침 남편은 밖으로 외출 나가고 없고 부인만 있었는데, 사문으로 변해 탁발(托鉢)을 하는 부처님께 온갖 욕설을 하고 비난을 퍼부었다.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몸이 불어터지고, 입에서는 벌레가 나오고, 배가 터지고 창자가 문드러져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부인은 두려워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남편이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놀라 두려움에 내닫는 모습을 보고는 부인을 잡고 자초지총을 물었다. 이에 남편은 활과 칼을 준비하고 사문을 쫓아갔다. 사문을 발견하고 활을 쏘았지만 사문이 유리로 된 작은 성[유리소성: 瑜璃小城]〕을 만들어 할이 튕겨나갈 뿐이었다. 그러자 그는 유리성 앞에 나아가 문을 열라고 말했다. 사문은 문을 열고 싶거든 활과 칼을 버리라고 했다. 그는 활과 칼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서 주먹으로 때려주고자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활과 칼을 버렸는데, 어찌하여 문을 열지 않느냐고 하자, 부처님은 “나는 그대 마음속의 악의라고 하는 활과 칼[心中惡意弓刀]을 버리라고 했지, 손에 든 활과 칼[手中弓刀]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표정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부처님은 그것을 악의라고 하는 활과 칼을 들고 있다고 표현하신 것이다. 진실 된 삶을 사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때로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얼굴에 그대로 표현하면 곤란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할 목적으로 마음속에 활과 칼을 들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 안에 간직한 무수한 칼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수행일 것이다. 우리가 칼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는 내려놓음으로써 내 자신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정 나 자신을 위한 일인지 냉철하게 생각하면, 마음속에 칼을 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을 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칼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네 종류의 빛이 있다고 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종류의 빛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달빛, 햇빛, 불빛, 지혜의 빛이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빛 가운데 지혜의 빛이 최상이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무엇일까? 여기서 세상이 고통임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고통이 소멸된 상태를 그대로 아는 것이 지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혜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어떤 상황이나 상상으로 덧보태어지거나 왜곡되지 않게 여실(如實:있는 그대로)하게 보는 것이 지혜이다. 사막을 몇 날 며칠 헤매던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나 마시는 물 한 모금과 말 그대로 물을 ‘물 마시 듯’마시는 사람이 ‘물’을 이해하는 것은 천지 차이일 것이다. 누구나 물이 소중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뼛속까지 깨닫고 아는 사람은 사막을 헤맨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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