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투사 황원방
진주성-항일투사 황원방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6.20 18:26
  • 14면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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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항일투사 황원방


황원방(黃元方)선생은 경남 통영군 통영읍 도천리 56번지에서 태어났으나 사천시(삼천포)봉남리 438번지로 본적을 옮겨 살았다.

부친은 황종우로 박식한 명의로 지성을 다한 분으로 유명했고 조상에 대한 숭상의 뜻이 높아 갑인년 대동보편찬에 참여한 분이다.

황원방 선생은 1910년 8월 한일합방 소식을 듣게 되자 20세 청년으로 애국애족심이 투철하여 금식 단식을 하면서 일제 타도를 외치자 모친 한산 이씨 이정 께서 걱정되어 단식 투쟁을 중단케 했다.

황원방 선생에 대해서는 항일투사로 공이 많은 김승학(건국훈장 추서)선생이 쓰고 1965년에 발행한 <한국독립사>318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통영인으로 4246년 6월에 만주 길림성 액목현에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군용지 40리를 매수하고 대금을 치르다가 중로에서 마적에게 피살되었다” 위의 내용을 밝혀주는 근거로 동아일보 1926년 6월 15일 2면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항일투사 서왈보는 본성 유씨로 1910년 8월 이후 조선을 떠나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광부로 일하다가 북경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고 정치 운동으로 변경하였다.

처음에는 조직적 계획으로 성공을 기약하였던 모 운동도 동지 황원방 씨가 조선 내지로 들어가다가 중도에서 소식이 끊어진 뒤로 그도저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했다.

서왈보는 유동렬 김규식 이태준 투사들과 연결되었으므로 황원방의 독립군 양성자금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것인데 황원방이 피살됨으로서 거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황원방 선생은 1914년 이전에 순국했으나 호적상 사망신고는 1914년 8월 14일 사망으로 기재되었다.

황원방 선생의 아들은 황준(黃濬)이며 손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황원방 선생의 손녀 사위가 사천 삼천포지역 전 국회의원 이방호 이며 황도환은 서울 서초에서 삼광클라스 대표 사장이다.

일제가 상부에 보고한 문서에 의하면 조선인으로 외지 또는 중국에서 사망한 명단가운데 황원방 이름이 들어있음을 볼 때 황원방 선생이 순국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므로 금년에는 명예회복이 성사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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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고개 2018-06-20 20:50:04
황원방 선생의 명몌회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