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詩 산책-옷보다 못이 많았다
김지율의 詩 산책-옷보다 못이 많았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8.07 18:2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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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옷보다 못이 많았다


그해 윤달에도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처음 집에서는 선풍기를 고쳐주었고 두 번째 집에서는 양장으로 된 책을 한 권 훔쳤다 농을 옮기다 발을 다쳐 약국에 다녀왔다 음력 윤삼월이나 윤사월이면 셋방의 셈법이 양력인 것이 새삼 다행스러웠지만 비가 쏟고 오방(五方)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이 흔들렸다 저녁에 밥을 한 주걱 더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새벽이 지나도록 지지 않았다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박준,‘옷보다 못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 자취를 한동안 했다. 지금처럼 편리한 원룸이 없던 터라 겨울에는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때맞춰 연탄을 갈아야 했고, 혼자 밥을 해 먹었다.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셋방의 정서는 그리 낭만적이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우울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방을 거쳐 간 이들이 남긴 곳곳의 흔적들을 볼 때면 열정과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던 때였다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가 윤달이라는 말은 참 쓸쓸하고 예쁘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여분의 남은 달인 윤달은 신이 인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한 달이기에, 이 달에는 결혼이나 이사 혹은 이장(移葬)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윤달은 ‘손’이 없는 달이라 무슨 일을 해도 잘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손’은 ‘민간 속설에서 날수를 따라 네 방위로 돌아다니면서 사람의 활동을 방해한다고 믿는 귀신’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방, 그 방의 벽에 박힌 못의 흔적에는 세월과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못 하나에 식구들의 옷을 주렁주렁 겹쳐 걸던 시절, 가난은 누구의 상처도 잘못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이삿짐을 옮겨주는 일은 그의 세간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선풍기를 고쳐주거나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슬쩍한다고 해도 옷보다 못이 많은 집들은 대개가 살기가 팍팍한 삶들의 집일 것이다. 어쩌면 농을 옮기다가 발을 다친 아픔은 그들이 한 동네에서 이사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눈치 챘을 때의 짠한 마음보다 덜 아플지도 모르겠다.

윤삼월은 춥지 않아 다행이라지만, 가슴에 얹혀있는 많은 일들과 생각으로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는 봄밤이기도 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오래 가난하고 오래 견딘다는 건 가장 힘든 싸움일지 모른다. 새 옷 한 벌 해 입지 못한 그 해,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라야 했던 시인의 사정을 알지 못하더라도 옷보다 못이 많다는 짠함을 전하는 시인의 시선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이 시인만이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 미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이 감성들.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한 발 뒤에서 조용히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다른 책의 이런 문장에서는 더더욱,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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