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계(契)와 향약(鄕約)
진주성-계(契)와 향약(鄕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8.09 18:28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계(契)와 향약(鄕約)

지방자치단체의 덕화(德化) 및 상호협조 등을 위하여 만든 규약(規約)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로 널리 시행되었는데 그 모체는 중국의 여씨(呂氏)향약이었다. 이 향약은 북송말에 섬서성 남전현의 여씨가 도학으로 명성을 떨친 대충(大忠) 등 4형제가 일가친척 등 향리전체를 교화선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향약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398년 태조 7년 부터였다. 향헌41조를 제정 향읍에 반포 실시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이다. 여씨향약은 4조로 되어있다. 첫째 선행(善行)을 권장하고 잘못은 고쳐 주자는 덕업상권(德業相勸)과 둘째 나쁜 행실은 서로 규제하자는 과실상규(過失相規)와 셋째 예의(禮儀)로운 풍속을 위해 서로 사귀자는 예속상교(禮俗相交)와 넷째 어려운 일을 서로 도와주자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이다. 이상의 4덕목 중에 마지막 덕목은 계의 성격과 일치하며 유계(遺戒)는 향약과 계의 복합적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계의 역사는 신라때 가배계(嘉俳契)가 효시라 볼 수 있고 선조때 정여립의 대동계(大同契)가 유명하며 이 점에 착안한 사람이 이황과 이이 두사람이었다. 이황은 동향(同鄕)의 선배 이현보의 유지를 받아 여씨향약을 참작해서 ‘예안향약’을 만들었는데 그 뒤 영조때의 퇴계학파로서 이름난 최흥원이 그의 향리인 부안동에 시행한 동약은 이황계통 중에서는 가장 정비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 이이는 1571년 청주목사로 있을 때 전직 목사들이 만든 향약을 수정하여 서원(西原)향약이란 것을 만들어 시행한 일이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을 살려 그는 1577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해주 석담에 은퇴하고 있을 때 해주향약과 해주일향약 속을 제정 실시하였는데 이 향약들을 만들 때에 ‘예안향약’은 물론 여러 향약을 근본으로 삼고 이를 실제의 지방 사정에 맞도록 가감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하였다. 이이의 향약이 후세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어서 숙종이후 영조 정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실시된 향약은 대부분 이이의 향약에 의거해서 된 것이었다. 그러나 탐관오리는 향약의 기능이 활발할수록 부정행위를 할 수 없었던 관계로 향약의 성장을 억제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므로 이를 조선말기에 향약이 점점 소멸하게 된 큰 원인의 하나라고 보는 설도 있다.

그리고 향약에는 약정 등 임원을 두었는데 이들이 자기들에게 부과된 권리를 남용하여 백성들을 위협 농락하고 서로 싸우며 모함함으로써 오히려 풍속을 문란케하는 일도 있었으며 향약이 유교적 도덕을 선양하고 지방자치 정신을 북돋우는데 크게 이바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