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남해 출신 이상태 항일투사
진주성-남해 출신 이상태 항일투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8.15 20:04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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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남해 출신 이상태 항일투사


동아일보 1922년 3월 19일 6단. 4월 17일자에 의하면 이상태(李相兌.李相太)선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출신인 이상태 선생은 김종명, 김인섭 등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의 목적을 가진 대한국민회에 가입하였다는 사실로 지난 달 3월 28일 해주지방법원에서 김종명은 징역형이 언도되었고 김인섭, 이상태 선생은 징역 1년 반이 언도되었다. 이에 불복하여 평양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피고 김종명, 김인섭, 이상태 등은 항상 조선독립운동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1919년 8월경 경성(서울)을 근거로 하여 조직한 대한국민회 회원이 되었으나 일제 경찰의 취재가 극히 엄중함으로 기약한 목적을 달성키 어려운 동시에 각지에 독립운동열기가 점점 빈약하여 감을 개탄하고 다시 중흥(中興)할 목적으로 작년 1921년 1월 15일 경기도 인천 인해여관에서 한흥회(韓興會)를 조직코자 활동하다가 그 후 조선 각지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에 폭탄, 권총 기타 무기를 사용할 줄을 알아야 될 것이니 조선 사람 된 우리는 이것을 먼저 연습할 필요가 있다고 하고 표면적으로 농업을 한다고 말하고 폭탄, 권총 사용법을 연구하고 중국 호석교자로 향하다가 경의선 차련관에서 전원 피체되어 감금(監禁)되었다. 1922년 4월 2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3년 7월 25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상태 선생의 훌륭한 공적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상태 선생의 공적은 국가보훈처 발행<독립유공자 공훈록>제 7권 211면, 563면에 등재되었고 김승학이 쓴 <한국독립사>하권 229면, <조선민족운동연감>(동문사 발행) 50면, 마산보훈지청에서 2001년에 발행한 <경남항일독립운동참여자록>등에 기재되어 빛나는 공적이 널리 공시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상태 선생이 건립한 혜관암이 남해군 동천리에 있고 삼동면 지족리 해양과학고등학교 교문 안에 이상태 선생 기공비(紀功碑)가 건립되어 학생들의 교육과 수범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이상태 선생은 1955년 12월 24일에 남해군에서 별세하여 1989년 8월 3일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 1묘역 1-103에 인장되었다.

아들 이영호씨가 사천시(삼천포)동금동에 거주하면서 부친의 훌륭한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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