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은자가 가르쳐 준 교훈
칼럼-은자가 가르쳐 준 교훈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9.17 18:0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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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은자가 가르쳐 준 교훈


내가 머무는 집은 좁고 누추하여 마음이 답답했다. 하루는 들에 나갔다가 농부 한 사람을 만났다. 눈썹이 길고 머리가 희었는데, 진흙을 등에 묻히고 호미로 김을 매고 있었다. 내가 그 옆에 서서 말했다. “어르신, 고생이 많으십니다”농부는 한참 있다가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호미를 밭에 내버려 둔 채 언덕으로 올라와 두 손을 무릎에 놓고 앉더니 턱을 끄덕이며 나를 불렀다. 그가 노인이었으므로 나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두 손을 맞잡고 섰다. 농부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의 옷이 낡기는 했지만 옷자락이 길고 소매가 넓으며 행동거지가 느릿느릿하니, 혹시 선비가 아니오? 손발에 굳은살이 없는 데다 볼이 두툼하고 배가 나왔으니,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니오? 무슨 일로 여기에 왔소? 이 늙은이는 여기에서 태어나 여기에서 늙었소. 이곳은 도깨비와 함께 지내는 거친 들판, 물고기와 함께 사는 외딴 바닷가요. 조정의 벼슬아치라면 죄를 지어 쫓겨나지 않고서야 여기에 올 이가 없소. 당신은 죄를 지은 사람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무슨 죄를 저질렀소? 자기 배를 채우고 처자를 먹여 살리며 수레와 말, 좋은 집을 얻고자 불의를 돌아보지 않고 끝없이 탐욕을 부리다가 죄를 지었소? 아니면 벼슬을 하고 싶지만 스스로 얻을 방법이 없어 권세가에게 빌붙었을 것이오. 수레와 말을 분주하게 쫓아다니며 식은 안주라도 얻어먹으려고 어깨를 움츠린 채 아첨하며 웃고 구차하게 그의 마음에 들려고 했을 것이오. 그러다가 요행히 낮은 벼슬을 얻었지만 모든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고 하루아침에 권세를 잃어 마침내 이렇게 벌을 받은 것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옳은 말을 하고 낯빛을 바르게 하여 겉으로는 겸손한 체하며 헛된 명성을 훔쳤겠지요. 어두운 밤에는 바삐 다니며 마치 날아다니는 새가 사람에게 의지하는 양 불쌍하게 애걸하며 이리저리 연을 맺어 벼슬을 구했을 것이오. 요행이 업무를 맡거나 간언하는 책임을 졌지만 녹봉만 받아먹고 맡은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제 몸을 보존하고 처자를 지킬 생각에 세월만 끌었겠지요. 하지만 공론이 들끓고 천도(天道)가 밝아져 속임수가 다하고 죄가 드러나 이렇게 된 것이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파를 만들고 앞에서 몰고 뒤에서 감싸며, 아무 일도 없을 때에는 큰소리로 공갈치며 임금의 총애를 바라고, 벼슬과 상(賞)을 제멋대로 주고는 기세등등하며 조정의 관원들을 업신여겼겠지요. 그것도 아니라면 정승이 되어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자기에게 붙는 사람은 등용하며, 곧은 선비가 옳은 말을 하면 성을 내고, 바른 선비가 도를 지키면 배척했겠지요. 아니면 나라의 형벌을 농단하여 자기의 사사로운 도구로 삼다가 악행이 쌓이자 화가 닥쳐 이렇게 벌을 받은 것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죄가 무엇인지 나는 알겠소. 힘이 부족한지 헤아리지 않고 큰소리치기를 좋아하며, 때가 아닌지 알지 못하고 바른말하기를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옛것을 사모하며,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거슬러 죄를 짓게 된 것 아니오? 내가 시골 사람이지만 나라의 법이 너그러운 줄 알겠소. 당신은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면 화를 면하게 될 것이오”

나는 그의 말을 듣고서 그가 도를 지키는 선비라는 것을 알고 부탁했다. “어르신은 숨어 사는 군자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나는 대대로 농사짓는 사람이오. 밭을 갈아 나라에 세금을 내고, 그 나머지로 처자를 먹여 살리니, 그 이상은 내가 알 바 아니오. 당신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가시오” 그러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물러가서 탄식했다.

정도전(鄭道傳)이 1375년 이인임(李仁任)등의 친원 정책에 반대하다가 나주 회진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글이다. 그는 이곳에서 2년 동안 생활하며 민간의 실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여러 편의 글을 지어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로 엮었는데, 이 글은 그 중 하나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농부는 가상 인물로 보아야 한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탐욕을 부린 자, 권세가에게 빌붙어 벼슬하고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자리만 차지한 자, 장군이나 정승과 같은 좋은 자리에 있으면서 권세를 농단하고 나라를 그르친 자 등 전형적인 탐관오리를 거론했다. 그리고 농부의 입을 빌려 당시 관료 사회, 나아가 지식인 사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오늘날 권세가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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