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스마트 세상, 매트릭스의 수인(囚人)
도민칼럼-스마트 세상, 매트릭스의 수인(囚人)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9.19 18:33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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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겸섭/경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김겸섭/경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스마트 세상, 매트릭스의 수인(囚人)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마트폰은 필수적 가전제품이다.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이 기기를 능란하게 다루는 유아도 적지 않다. 이미 ‘스마트 시티’라는 청사진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네트워크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또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이들 첨단 기술이 가져다 준 편리함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소통의 무한 확장 가능성에 주목한다. 특히 스마트 미디어와 결합한 인공지능과 초연결 네트워크는 정보의 음지에 있던 사람들을 양지로 끌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친절한’ 이들 미디어는 공론장(公論場)의 확장을 통해 디지털 민주주의의 미래를 열어준 우리 시대의 프로메테우스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 첨단 기술들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 강의실 풍경은 스마트 낙원의 미래를 절망하게 한다. 강의에 상관없이 수업 내내 스마트폰에 몰입하는 학생들을 보며 혹 우리가 스마트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혹 스마트폰이 프로메테우스의 저주라면? 수업 중인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이 지나친 나머지 스마트폰 콘텐츠에 소리 내어 웃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자매’)의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린다. 지하철이나 버스같은 공공교통수단 안에서 독서문화가 사라지고 심지어 식구들의 밥상머리에서조차 대화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런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매트릭스> 3부작은 불릿-타임, 벌리-브롤, 화려한 무술 등 수많은 볼거리를 선사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설 <공각기동대>, SF의 고전 <뉴로맨서>를 참조하는 가운데 신화적ㆍ철학적 주제들을 비벼 넣은 것도 이 영화의 특장이었다. 특히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매트릭스(matrix)’라는 장치는 스마트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용법과 관련하여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매트릭스는 컴퓨터 기술 혁신의 산물인 인공지능(AI)과 인간 사이의 전쟁이 낳은 인간 통제 수단이다. 그것은 기계에 의해 통제되는 인간과 기계의 혼합체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그것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주인공 네오(Neo)는 기계의 일방적 지배와 전쟁을 종식하고 서로의 조화로운 하나됨(one)을 위해 싸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기계가 완벽한 조건에서 인간을 사육할 때 모든 사람은 사이버스페이스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매트릭스로부터의 ‘탈주’는 의도적으로 시스템의 완벽한 폐쇄성을 파괴할 때 극복되기 시작한다. 주인공 네오는 매트릭스 시스템의 균열을 가져오는 ‘버그’(bug)가 됨으로써 기계와의 화해를 실현한다(기계를 쓰지 말자거나 폐기하자는 것이 아님에 주의하라!). 이는 기계의 노예가 아니라 그것을 ‘기능전환’하여 진정한 창조와 소통의 매개로 쓰고자 하는 전략이다. 영화에서 시스템이 예측하지 못한 ‘사랑’은 구원의 약제이다.

스마트기기와 인공지능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소지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닐까? 필자는 ‘사랑’을 관계의 회복으로 해석한다. 가령 ‘카톡’이나 ‘텔레그램’ 등은 상대방의 관점을 공유하는 ‘교류’의 수단일 수 있지만 ‘끼리끼리’의 자폐적 세계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파르마콘’(독ㆍ약)과 같다. 이미 도래한 ‘서드 라이프’(the third life)의 시대, 과연 우리는 어떤 용법을 개발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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