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쟁’ 6·25를 기억하며
‘잊혀진 전쟁’ 6·25를 기억하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2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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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존립 위해 헌신한 이와 그 유가족 돌보는 것 나라의 미래 위한 길

▲ 국가존립을 위해 헌신한 이와 그 유가족을 돌보는 것은 나라의 정체성과 미래를 위한 길이다.
6월25일은 북한군이 20만의 대군, 200대의 야크(YAK) 전투기, 700대의 탱크로 전면 남침을 시작한 지 61년이 되는 날이다. 침략을 당한 남쪽에서 보면 전쟁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한 북한군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이틀 후인 27일 밤에는 서울을 점령했고, 불과 한달 만에 ‘남한 해방’을 선언할 정도로 부산 교두보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차지했다. 이때 부산 교두보를 지키기 위한 영천전투, 다부동전투 등은 그 처절함으로 인해 전쟁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북한의 생각처럼 간단치만은 않았다. 유엔이 북한의 남침을 징벌하고 신생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통해 16개국이 파병했고, 혈육상쟁에서 국제전으로 변한 전쟁은 3년 1개월 13일간 지속됐다. 전사자는 미군만 3만7000명, 한국군은 무려 15만명에 달했다. 부상자는 100만에 이른다.

몇 년 전 참여정부의 모 장관이 국회에서 북침이냐, 남침이냐 하는 질문을 받고는 “모르겠다”고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해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6·25전쟁이 언제, 어디서, 누가 일으킨 무슨 전쟁인지도 모르는 젊은 사람이 많다는 보도를 접한 바 있다. 새삼 올바른 역사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6·25전쟁은 대한민국이 독립한 지 1년 9개월 만에 옛 소련의 군사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국토 대부분을 내주고, 수도 서울은 두 번이나 유린당한 끝에 유엔군(미군이 주력)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지켜낸 전쟁이다. 전후세대는 실감하기 어렵겠지만 대한민국의 운명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기로에 있었고, 정말이지 ‘겨우’ 막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 그렇게 못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6·25전쟁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직접, 그것도 핵심부에서 생생하게 체험한 필자의 확고한 증언이다.

자기나라는 자기가 지켜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6·25전쟁은 우리에게 피부로 전해줬다. 역사교육이란 지난날을 배우면서 자기를 알고 또 있을 수 있는 일들을 판단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대화인 것이다. 한국전쟁의 별칭이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6·25전쟁에 대해 이른바 ‘수정주의 사관’이라는 것이 지금도 학교 교과서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북침설까지는 아니지만 남침 유도설이라든가, 6·25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크고작은 무력충돌이 있는 전시상태였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시대를 직접 산 필자가 보기에 이는 아무리 역사해석에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고는 해도, 지나친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치만 봐도 북한의 ‘준비된 남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Marshall 원수)은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간의 화평조정을 시도했다. 이것이 실패하자 미국은 장개석 정부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 그러자 중국은 모택동의 손에 넘어갔다. 또 중국 전문가 웨드마이어(Albert C. Wedmeyer) 장군과 주일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원수는 ‘소련이 북한군을 증강하고 있고, 곧 소련이 남북에서의 미소양국의 철수를 주장하면 미군도 나와야 할 터이니 한국군도 증강해야 한다’는 건의를 워싱턴에 수 차례 올렸지만 번번이 묵살되었다. 이후 소련의 주장대로 북한의 소련군은 철수했고, 남한의 미군도 1949년에 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철수했다. 이때 한국군 총병력은 경장비로 무장된 6만 명 수준이었다.

이어 마샬의 후임으로 국무차관이던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이 국무장관이 되고, 그는 1950년 1월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방위선 밖이라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남침을 공개 초청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6월25일 남침이 시작되자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인 미군을 이끌고 한국 전선에서 지연작전을 폈고 겨우 부산 교두보를 지켜냈다. 이어 워싱턴의 반대를 어렵게 설득하고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9월28일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냈다. 곧 중공군 100만의 인해전술로 전선이 다시 어렵게 돼 맥아더 장군은 후퇴하면서 압록강 철교 12개를 폭격하도록 미 5공군에 명령을 내렸으나 워싱턴의 폭격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다리는 그냥 남게 됐고, 이를 건너 중공군이 대거 넘어와 유엔군은 수원, 용인, 이천, 여주, 원주 선까지 후퇴했다. 후퇴과정에서 나온 ‘흥남 철수 작전’도 역사에 남는다.

이 무렵 맥아더 장군은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를 건의했다고 보도돼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퇴임 후 그러한 요청을 한 일이 없다고 밝혔다. 실은 1950년 11월에 트루먼(Truman) 미국 대통령이 ‘원자탄 투하’를 발설했다가 곤란해지자 ‘원자폭탄 투하는 안하겠다’고 영국(사회주의 정권)을 통해 소련 측에 알렸다고 한다. 유엔군은 51년 1월 25일을 기해 총반격, 다시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게 되었고, 51년 4월에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전격 해임됐다.

1951년부터 끌었던 휴전회담은 우여곡절을 거쳐 1953년 7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뺏기 위한 마지막 대격전을 치른 후 1953년 7월27일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한국은 서명을 하지 않고) 미군, 중공군, 인민군 대표 간에 서명이 이뤄졌다. 이 휴전 상태가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전쟁 초기 6만 명이 전차 한 대 없이 경무장한 상태에서 미군과 협동작전을 폈던 한국군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2개 군, 5개 군단, 20개 사단을 갖는 현대군으로 발전했다. 또 전시 중에 미국보병학교에 1000명, 미국포병학교에 600명 단기 도미유학을 보냈고, 그 장교들 중에서 일부가 후에 5·16군사혁명의 주체가 돼 이후 20년 간 한국을 현대화하는 데 일조를 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국제 및 서양 문물은 6·25전쟁을 통해, 미군을 통해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기획, 예산, 관리 시스템 등 한국정부의 주요 기능도 5·16 후에 군이 채택한 것이다. 필자가 모두 지켜본 모습들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는 피지 않는다’는 말을 듣던 한국은 이후 완전한 폐허에서 복구돼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로 살아가던 한국이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은 것이 분명히 있다. 150마일 휴전선을 두고 남북 양쪽이 100만 대군을 배치해 놓은 휴전의 긴장상태가 58년 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실감하지 못할 뿐이지, 이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국제 정세 전문가들은 중동 다음으로 전쟁 위험이 있는 곳으로 한반도를 꼽는다.

한국민은 민주화, 산업화의 길을 걸어오면서도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파트너는 완전히 다른 체제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탄도미사일과 핵개발을 계속하면서 가끔 협박이나 무력공격을 하는 북한이다. 이런 북한을 어떻게 대하면서 평화와 통일로 유도해 내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희망을 걸었던 6자회담도 중단 상태다. 다행히 천안함사건, 연평도 피폭사건 이후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이 높아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불가침조약 위반 침공을 경험한 일본의 경우 그 불신이 지금도 남아있다. 불의의 남침을 당한 한국은 북한에 대한 불신의 감정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물론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그 불신을 어떻게 극복해 우리가 목표로 하는 길로 유도하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건전한 불신’ 즉,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굳건한 안보의식은 꼭 필요한 것이다.

6·25전쟁 때는 방아쇠만 당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전선으로 불려갔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합법적으로 병역의무를 면제받은 사람도 있지만 병역의무 기피를 위해 외국에서 시민권을 갖고 다년간 경력을 쌓았다던가, 섬에서 고시준비를 해서 입대통지를 못 받았다던가, 신체에 일부러 상해를 입혀 징병을 기피한 사람들이 제법 있다. 또 이들이 대학총장이나, 국회나 정부고위직에 앉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이 돼 공정사회니, 민족화해니, 안보의식이니 하며 목소리를 높인다면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을 듯 싶다.

얼마 전 파리에서 K팝 공연이 열렸는데 큰 화제가 됐다고 한다. 경제를 넘어 이제 문화선진국을 향해 달리고 있는 한국은 국민의 안전(국방)과 복지를 위해 더욱 매진해야 한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며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생각할 때다. 이런 가운데 역사 교육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6·25전쟁은 신생 대한민국을 지켜낸 것이고, 88서울올림픽은 동구권 민주화를 앞당기면서 우리 국민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사건이라는 등, 알릴 것은 확실하게 후세에 전해야 한다.

그리고 말에 그치는 교육이 아니라 윗 세대가, 그리고 정부가 실제로 이런 역사의식을 현실에 반영해야 한다. 예컨대 6·25전쟁 때 참전한 용사, 상의군경, 군번 없는 학도병, 지게부대에 대한 마땅한 보훈은 국격에 맞게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의 보훈예산은 연간 3조 원이다. 프랑스는 63조 원, 호주가 8조9000억 원이다. 어느 나라보다 국방을 중시하는 미국은 81조 원의 보훈예산 이외에도 교육지원, 직업재활, 대출지원, 의료보조를 추가로 실시하고 있다. 미국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는 영원히 책임진다는 의식이 강하다. 국가존립을 위해 헌신한 이와 그 유가족을 돌보는 것은 나라의 정체성과 미래를 위한 길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한자어에 익숙치 않은 요즘 젊은이들은 현충일이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도 잘 모른다고 한다. 호국이니 보훈이니 하는 말이 고루하게 들릴 수도 있다.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혹시 가계(家系)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그 윗대라도 6·25전쟁에 참전한 사람이 있다면 자랑스럽게 여기자. 다른 집이 그렇다면 감사함을 표하자. 이 같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6·25전쟁 때 조국수호를 위해 싸우다가 산화한 영령에게 삼가 깊은 애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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