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정철의 관동별곡
진주성-정철의 관동별곡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0.11 18:36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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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정철의 관동별곡


정철(鄭澈 1536-1593) 선조때 명신 문인 호는 송강(松江) 서울출생 27세때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직, 서인의 거두 1580년도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가 관동팔경을 벗하였다. 이듬해 조정에 돌아왔으며 1589년 우의정 얼마후 동인에 밀려나 명천 진주 강계등지로 귀양을 다니고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귀양에서 풀려나와 평양에서 임금을 맞은 뒤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임금과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강화에서 병사했다.

본래 성질이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화를 입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었다.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관동별곡 평창의 성산 기슭에 들어가 지낼 때 지은 성산별곡 등을 위시하여 우리말체로 된 수많은 가사들은 국문학사상의 일품들이다.

1580년(선조13) 정월 작자가 45세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내외 해금강과 관동팔경 등의 절승을 두루 유람한 후 그 도정(道程)과 산수 풍경 고사 풍속 및 자신의 소감등 읊은노래로 조선시대 가사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손꼽을만한 백미편이다.

음률이 주로 3·4조로 이루어진 이 가사의 용어는 비교적 순수한 우리말이 많고 비록 한문어휘라 하더라도 대게 우리말화한 것들이다. 이 가사는 파란이 심하였던 작자의 관직생활에서 비교적 득의에 찼던 시절의 작품인 만큼 전체의 분위기가 웅장하고 명쾌하여 화려체의 문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색이다.

전편을 크게 4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단은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된 감격과 임지로 부임하는 모습을 엮은 서곡이고 제2단은 내금강의 절경을 읊은 노래이며 제3단은 외금강 해금강과 관동팔경의 절경을 읊은 노래이고 제4단은 작자의 풍류를 꿈속에서 신선이 되어 달빛 아래 노니는데 비유한 결구이다. 송강가사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죽림(竹林)에 누엇더니 관동(關東) 팔백리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드리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下直)고 물너나니 옥절(玉節)이 압패 섯다. 평구역(平邱驛)말을 가라 흑수(黑水)로 도라드니 섬강은 어듸메오 치악(雉岳)이 여긔로다 소양강(昭陽江) 나린물이 어드러로 든단말고 고신거국(孤臣去國)에 백발도 하도할사”

강화에 온지 한달만인 1593년 12월 18일 정철은 숨을 거두어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도 종지부를 찍었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있는 정철과 그의 아들이 상하장으로 묻혀있다. 진천현감으로 있던 정철의 후손과 송시열의 주선으로 이장했다. 천고의 간흉, 여린 감정을 유려한 언어로 풀어놓을 줄 아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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