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생사의 길을 달리한 친구 성삼문과 신숙주
칼럼-생사의 길을 달리한 친구 성삼문과 신숙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0.22 18:2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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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생사의 길을 달리한 친구 성삼문과 신숙주


우리는 흔히 성삼문(成三問:1418~1456·38세)하면 충신의 표본으로, 신숙주(申叔舟:1417~1475·58세)하면 변절자의 표본으로 알고 있다. 과연 정당한 평가일까? 지난날에는 그런 의식이 고정관념으로 굳어 있었다. 유교 윤리에서 충과 효는 가장 중시되는 실천의 덕목이었다. ‘충(忠)’의 기준에 따라 충신과 역적이 갈라지고 절개와 변절이 나뉘는 것이다. ‘충’을 기준으로 위 두 사람을 재평가해 보고자 한다. 두 사람의 출신 배경과 입신 과정은 너무나 비슷하다. 나이로 따지면 신숙주가 한 살 위였으나 조정에서 학자관료로 입신할 적에는 서로 앞뒤 자리를 주고받았다.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申檣)은 문관인 참판의 벼슬을 누렸고,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은 무관으로 출세하여 도총관(都摠管: 정2품 무관직)의 자리에 올랐다. 성삼문은 17세 되던 해인 1435년 생원시에 합격해 첫 벼슬을 받았고, 3년 뒤 신숙주도 생원시에 합격해 조정에 나와서 성삼문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20대 중반에 집현전의 학사가 되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이 때 세종은 정음청(正音廳)을 만들어 한글창제의 일에 전념했다. 이 때 두 사람은 언제나 어울려 다녔다. 세종은 이 두 사람을 특별히 총애하여 온천에 갈 적에도 데리고 다녔다. 두 사람의 우정은 형제사이보다도 더했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두텁고 두터운 지기(知己)가 되었다. 이 때 우리나라 음운(音韻)을 집대성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했다. 이 일로 하여 세종의 성삼문과 신숙주에 대한 신임은 더욱 굳건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명나라 한림학사인 황찬(黃瓚)과 13차례 이상 왕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이 죽자 사정이 달라졌다. 병약하여 일찍 죽은 문종의 뒤를 이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신숙주는 수양대군과 친분을 두텁게 가지기도 했지만 성삼문은 수양대군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주도하여 수양대군의 정적인 김종서를 죽이는데 성공하여 한명회는 영의정이 되고, 신숙주는 도승지가 되었다. 수양대군은 성삼문을 승지로 임명하여 학자들을 정권유지에 이용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 때 신숙주는 충심으로 수양대군을 돕고 있었으나 성삼문은 내밀하게 딴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양대군은 1455년(단종3년) 마침내 단종을 압박하여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때 마침 명나라의 사신이 와서 경회루에서 연회를 베풀기로 되어 있었는데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이 자리에서 새 임금과 그 동조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 계획은 일행 중 한 명인 김질의 배신으로 불발로 끝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성삼문은 물론 온 가족이 몰살을 당했다. 그러나 신숙주는 6대 임금을 섬기며 영의정을 지내는 등 현세에서 영화와 부귀를 한평생 누렸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17세기가 되자 사림(士林) 출신들은 사육신의 복권을 결정 한 뒤 충신으로 기리는 작업이 이루어져 21대 왕 영조는 성삼문에게 충문공(忠文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우연인지 고의인지 신숙주의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었으니 두 사람의 시호가 글자 한 자의 순서를 바꾸어 놓은 것이었으니 그들은 죽어서도 인연의 끈을 떼어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이들에게 역사적 평가를 달리하는 견해들도 있다. 성삼문이 몸을 바쳐 한 임금(단종)을 섬긴 것은 유교적 ‘충’에 충실함이라 군신 사이에 절의를 지킨 기준에 따르면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신숙주는 생육신의 길을 걸어 조선 초기 제도와 문화가 정비되는 시기에 많은 업적을 쌓았음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충’이란 본질적으로 왕조체제에서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큰 힘이 되는 덕목이지만, 임금 개인에게로만 향하는 편협한 가치관으로 귀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친구이지만 20년 먼저 죽은 성삼문은 이 땅의 문화와 학문에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숙주는 이 나라 역사에 충을 쏟았다고 볼 수 있고, 성삼문은 단종이라는 개인에게 충을 쏟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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