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시월의 마지막 날
진주성-시월의 마지막 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0.30 18:39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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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시월의 마지막 날


아침 햇살을 등받이로 삼아 남향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찻잔의 온기만큼이나 등이 따사롭다. 커피향의 구수함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정원수의 단풍잎에서 더 진하게 우러나는 것 같다.

나무마다 그 빛깔이 다르다. 빨갛게 혹은 샛노랗게도 물들었다. 분홍빛깔도 어우러져 영롱하면서도 온화하다. 야단스럽게 뽐내지 않아서 좋고 지나치게 겸손하지 않아서 더 좋다. 빨간 빛깔에 눈길이 먼저 간다. 샛노란 빛깔도 눈길을 끈다. 저마다의 마지막 단장이다. 먼 길을 떠나야하는 정성어린 차림새다. 남길 것도 없고 보탤 것도 없이 전부를 다한 최후의 단장이다.

재주도 능력도 다 했다. 갖은 힘도 다 쏟았다.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서글퍼 하지도 않는다. 겸손함일까 겸허함일까 그저 환하면서 담담하다. 그러나 가벼움도 아니고 무거움도 아니다. 가만가만 조용하다.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 말 않고 먼 갈 떠날 준비를 하느라 아낌없는 마지막 열정을 쏟아내는 것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고 전부를 소진하여 곱게 단장을 한다. 치장이 아니다. 꾸밈도 아니다. 있는 것 모두를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모습만을 남기려고 전부를 다하여 단장을 한다.

군더더기도 없고 지나침도 없다. 아름다워도 야하지 않고 청정하고 정숙하다. 짙으면 짙은 대로 옅으면 옅은 대로 단장을 하지만 과하여 천박하지 않고 모자라서 초라하지도 않다. 자태는 처연하고 정취는 고고하다. 할아버지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같고 아직도 분내가 나는 할머니의 미소와도 같다. 요란함을 멀리하고 정숙하며, 처량함도 멀리하고 초연하다. 황홀하게 찬란하지도 않으면서 따사롭고 영롱하다. 단풍잎 곱게 물들어가는 시월의 마지막 날은 지긋하게 눈을 감게 한다.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눈앞에 어른거리게 하고 지나간 세월이 옛 이야기로 다가온다. 미안한 생각을 하게하고 마음의 편지를 쓰게 한다. 못 다준 정이 앙금이 되어 가슴을 찡하게 조이게 하고 멀어져 간 사람들을 그립게 한다.

아늑한 찻집에 앉아 느긋한 첼로 연주를 듣고 싶게 하고 간이역 플랫폼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보고 싶게 한다. 산사의 풍경소리가 듣고 싶고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걷고 싶게 하고, 멀리서 들여오는 색소폰 소리도 듣고 싶게 한다.

가을! 그 깊은 곳으로 빠져들게 하는 시월의 마지막 날은 아늑한 레스토랑에서 은은한 배경음악 마법의 숲을 들으면서 잘 구워 낸 스테이크를 썰며 백포도주 한 잔을 마시고 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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