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투사 이관 선생 순국 90주년(2)
진주성-항일투사 이관 선생 순국 90주년(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1.07 18:26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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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항일투사 이관 선생 순국 90주년(2)


2001년 3월 1일자 부산일보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기미 독립선언서 초안 산청 이관 선생이 작성”

한국민족운동사에 불온문서기초자라는 기록된 것을 제시한 추경화씨.

1919년 3.1운동 당시 선포된 <독립선언서> 초안작성자가 당초 일려진 육당 최남선 선생이 아니라 경남 산청 출신 학자 녹초 이관 선생이라는 주장이 향토사학자에 의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경남 진주지역 향토사학자인 추경화 씨는 1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처음으로 작성한 인물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출신의 학자 녹초 이관 선생이며 이를 기초로 다른 사람이 수정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추씨는 자신의 주장과 관련. 천도교 이관이라는 자를 불온문서 기초자로 체포해 심문 중이다라고 기재된 <한국민족운동사 자료집(국회도서관 소장)>의 내용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또 이관 선생의 행적이 기록된 <독립운동사>제 8권. <독립운동사 자료집>제 9집 등을 통하여 이같은 주장의 배경으로 내세웠다.

추씨와 자료집에 의하면 지난 1860년 12월 산청에서 태어난 이관 선생은 천도교에 입교. 천도교 기관지인 천도교 월보의 판집원이 되었으며 3·1운동 당시 편집원 겸 전도사로 10년 째 근무중이었고 손병희 선생과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근무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선생은 특히 3.1운동 때에는 인쇄 책임자였던 이종일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3천장을 받아 서울 지역에 배포했으며 3.1운동이 발생한지 55일만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 후 태펴양회의에 제출한 진정서에는 국민대표 자격으로 서명하기도 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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