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1)
칼럼-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1.19 18:2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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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세계사를 뒤 흔든 소금(1)


지금부터 5회에 걸쳐 소금의 역사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고대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금을 얻는 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소금을 가진 자는 돈과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고대 동서양 제국들의 역사도 소금과 관계가 많다. 로마가 소금으로 일어났고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천하통일 사업도 소금 덕에 가능할 수 있었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얻는 생산이 최초의 제조업이었다. 당시는 소금이 귀해 이윤이 높아 대부분 권력자의 전매품이었다. 소금이 흔해진 것은 최근세에 들어와서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의 천일염 제조방식이 도입된 것은 1907년으로 인천 주안 염전(鹽田)에서 최초의 천일염이 선을 보였다. 그 뒤 소금의 자금자족이 이루어진 것은 1955년이고 소금의 전매제도가 해제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이듬해인 1962년이었다. 1997년 7월부터 수입자유화가 되면서 다른 나라의 소금도 수입하기 시작했다.

아기가 자라는 엄마 뱃속의 양수는 바닷물과 같다. 소금물이 아니라면 아기는 안전하게 자랄 수 없다. 사람은 소금물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나서도 소금이 중요하다. 사람의 혈액이 0.9%의 염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루 평균 10~15그램 정도의 소금을 매일 섭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탈수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 여러 종류의 암이 있지만 ‘심장암’은 없다. 즉 심장에는 암이 생기지 않는다. 심장은 소금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심장을 ‘염통(鹽桶)’이라고 불렀다. ‘소금통’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에는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태초부터 치열했다. 이미 선사시대에 소금이 산출되는 소금호수(염호:鹽湖) 그리고 소금바위(암염:巖鹽)가 있는 장소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들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해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그 결과 소금을 얻기 위한 시장과 교역로가 발달했다.

소금은 옛날부터 육류의 부패를 방지하고 인간의 건강과 정력을 유지하는 식품으로 활용되어왔다. 또한 신비한 의미가 부여되어 청정과 신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대에는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신생아의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피부를 단단히 하도록 하고 병균으로부터 보호했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시체를 일주일 동안 소금물에 담갔다.

유대인들은 예배 때 소금을 신에게 바쳤다. 그리고 신에게 바치는 짐승의 고기는 소금으로 절여 짜게 했다. 이런 풍습은 그리스나 로마에도 있었다. 또한 소금이 물건의 부패를 방지하고 변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해서 고대인은 소금을 변함없는 우정·성실·맹세의 상징으로 여겼다. ‘성경’의 ‘소금의 맹세’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아랍인은 함께 소금을 먹은 사람을 친구로 여기는 풍습이 있다. 이들은 소금을 더불어 먹음으로써 약속이나 계약의 신성을 보증했다. 아랍뿐 아니라 중세 유럽에서도 귀한 손님이 오면 소금으로 조리한 음식을 대접하며 그 앞에 소금 그릇을 놓았다. 아프리카 내륙에서는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소금무역이 계속되고 있다. 소금은 ‘흰색의 금’이라 불리며 같은 양의 황금과 맞교환될 정도로 비쌌다. 고대 그리스인은 소금으로 노예를 샀다. 옛날에는 소금을 얻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딸을 팔기도 했다. 소금은 물에 녹더라도 증발을 통해 다시 소금이 된다. 그 무렵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들의 3대 교역품은 ‘소금, 황금, 노예’였다. 실제 12세기에는 소금이 가나에서 금값으로 교환되기도 했으며 노예 한 명이 그의 발 크기만 한 소금 판과 맞교환되기도 했다. 중세에는 4만 마리의 낙타로 구성된 대규모 대상들이 무려 한 달 동안 806km를 걸어 소금을 수송하기도 했다. 12세기 이후부터 대서양 염전의 소금은 북해상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14세기 프랑스 왕실은 소금 전매를 통해 수익의 삼분의 이를 왕실 소유로 삼았고 이 소금을 제네바까지 공급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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