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줄탁동시(啐啄同時)
아침을 열며-줄탁동시(啐啄同時)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12.10 18:49
  •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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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망경초 교장·시조시인·아동문학가

김용진/망경초 교장·시조시인·아동문학가-줄탁동시(啐啄同時)


‘줄탁동시’를 고사성어 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줄탁동시’는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저절로 떨어진다’라는 뜻의 ‘과숙체락(瓜熟蒂落)’과 쌍을 이루어 ‘때가 성숙하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며, 기회와 인연이 서로 투합한다.(瓜熟蒂落, 啐啄同時)’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로, 원래 민간에서 쓰던 말인데 송(宋)나라 때 《벽암록(碧巖錄)》에 공안(公案, 화두(話頭))으로 등장하면서 불가(佛家)의 중요한 공안이 되었다.

「경청(鏡淸)은 항상 줄탁지기(啐啄之機)로 후학들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일찍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행각하는 사람(사방을 떠도는 중)은 반드시 줄탁동시의 눈을 가져야 하고 줄탁동시의 씀을 가져야 비로소 승려라 할 수 있다. 마치 어미가 밖에서 쪼려고 하면 새끼가 안에서 쪼지 않을 수 없고, 새끼가 안에서 쪼려고 하면 어미가 밖에서 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鏡淸常以啐啄之機開示後學. 曾示衆說, 大凡行脚人, 須具啐啄同時眼, 有啐啄同時用, 方稱衲僧. 如母欲啄, 而子不得不啐, 子欲啐, 而母不得不啄)」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때가 되면 알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부리로 껍데기 안쪽을 쪼는데 이를 ‘줄’이라 하며, 어미 닭이 병아리 소리를 듣고 알을 쪼아 새끼가 알을 깨는 행위를 도와주는 것을 ‘탁’이라고 한다.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요, 어미 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일러 주는 스승으로 비유할 수 있다. 안과 밖에서 쪼는 행위는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스승이 제자를 깨우쳐 주는 것도 이와 같아, 제자는 안에서 수양을 통해 쪼아 나오고 스승은 제자를 잘 보살피고 관찰하다가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깨우침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하는데, 이 시점이 일치해야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이 일어난다」라고 되어 있다.

21세기의 교육을 하는 데 나침반의 역할이 아닌가 여겨진다. 예전에도 많은 학자들과 선지자들이 일컬어온 교육임에는 틀림없으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요즈음 사람들은 교육을 함에 있어서 ‘줄’의 의미를 ‘탁’의 의미보다 더 강조하는 듯하여 씁쓸한 면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줄’은 하지 않고 ‘탁’만으로 깨어난 병아리는 오래 살지를 못하고 죽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스스로 깨어나면서 밖에서 도와줄 때만이 자립하여 살아가는 힘이 생기는 것이 만물의 이치며 생존의 원리인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나라의 교육은 대부분이 ‘줄’보다는 ‘탁’을 중시하여 온 것이 여태까지의 주류인 듯하다. 그런데 요즈음은 ‘배움’이라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즉 ‘줄’을 사용하는-이 더욱 힘 쏟도록 하는 교육이 주가 되어 가고 있다. 즉 정보가 빠르게 넘쳐나는 사회에서는 ‘탁’을 해서는 변화에 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식보다는 지혜를 가지기를 바라는 사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지식을 선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한 번 쯤 생각해보고 바꿔야 하는 인식이 아닌가 여겨진다. 기계가 앞서가는 사회가 될수록 인문학이 더욱 요구되는 사회이다. 수많은 지식의 홍수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획득하고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로 하는 지식 외에는 가감이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주도적인 습관이 중요시된다. 스승은 옆에서 격려해주고 조금만 ‘탁’을 해주면 제자는 스스로 깨우쳐서 자기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많은 교육자들은 꼭 ‘줄탁동시(啐啄同時)’를 염두에 두고 제자를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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