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탄과 국제농업협력사업
부탄과 국제농업협력사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4.2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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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상/경남과기대
바이오과학대학장
2008년 9월 말부터 4주간 부탄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국의 전통 차(茶) 제다기술교육을 하였다. 이 일을 하게 된 동기는 부탄 농림부 장관(Sangay) 일행의 한국 방문시(2006년 여름)에 “부탄의 낙후 농촌마을 소득증대 사업으로 녹차재배가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박홍수 농림부 장관에게 하였다.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으나 그 방법과 절차에 대해서는 구체화하지 못하였다. 일행은 100년 농업기술 교육의 요람인 경남과학기술대학교와 부탄의 지형과 유사한 하동 지역의 녹차다원을 방문하였다.

한국과 부탄 두 나라 장관회의에서 결정된 일이었지만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추진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획 또는 계획을 수립할 주체가 없었다. 그러던 중 농림부 담당부서에서는 이를 국제농업협력사업의 과제로 추진하기로 하고 본 대학에 협조요청을 하였다.

당시 강군중 학장은 사업추진의 적임자를 발굴하지 못한 상황에서 접수 마감 이틀을 남기고 본인에게 본 사업의 계획서 수립을 요구하였지만 준비된 자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국제농업협력사업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져야 하는 조건이 국가간 또는 기관간의 상호교류협약서(MOU)의 유무이다. 사업의 타당성, 필요성, 상대국의 요구, 지속가능성, 현지상황 및 사업추진경험 등이 평가 항목들이었다.

그 즈음 부탄은 제4대 국왕이 왕권을 아들에게 양위하고, 왕권국가에서 입헌군주제로 국권의 전환시기여서 이러한 일련의 업무가 다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 정당이 생겨나고 선거를 통하여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서 정권을 획득하는 2007년의 시대적 상황이었다. 부탄 농림부 장관(Pema Gyamcho), 차관(Sherub Gyaltshen), 국장(Tashi Samdup) 등 조직이 새롭게 구축되었다. 따라서 앞선 정부에서의 업무에 대해서는 후임자들은 정보가 없었다.

우리나라 농림부의 국제농업협력사업은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본 대학에서는 두 번째 해에 사업을 신청하였고, 일곱 과제중에서 낮은 평가점수를 받았다. MOU 협약서가 없는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당해연도에 협약서 작성을 목표로 하고 조건부 허락으로 사업의 승인을 받았다. 10명의 부탄인을 초청하여 한국의 전통 차(茶) 제다기술 교육훈련이 그 목표였다.

강군중 학장님과 함께 물어물어 부탄을 찾아갔다. 부탄 농림부의 세럽 차관님을 만나서 본 사업의 취지를 설명하고 향후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 과정에서 교육 대상자는 일차적으로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고 연차적으로 농민 대상으로 하자는 의견에 공감하면서 선발권을 일임하였다. 공무원을 먼저 교육시키고, 그 공무원들이 농민들을 교육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언어적 문제로 의사전달이 불명확하기 때문이고, 외지에서의 신변에 대한 보호를 보장할 수 없었다.

100여년 전에 부탄의 2대왕이 심었다는 차나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여 부탄 중부지역 투롱사로 향하였다. 30에서 40킬로미터의 속도로 반쯤 포장된 1차선(전체 도로 폭이 3~4m) 고속도로를 하루 온종일 가야만 부탄의 제2도시인 투롱사에 도착하였다. 투롱사의 다왈라 장관님(옆구리에 칼을 차고 있음)의 영접을 받아 뷔페식 저녁을 먹고 곧바로 숙소에서 잠을 청하였다. 이곳은 TV가 없다. 방송중계를 할 수 있는 기지국이 설치되지 않아서.

아침을 먹고 차량으로 한 시간 가량이면 삼촐링 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 전체는 170여 가구, 인구는 약 750여명 정도였다. 당일 만난 녹차에 관심을 갖는 농민은 40여명이었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이지만 두 집을 제외하고는 차(茶)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니마 아줌마 집에는 100년 차나무를 정원수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대엽종 25그루와 소엽종 두 그루가 차나무의 전부였다. 그나마 도지 아저씨 댁에서 차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아줌마의 차 만드는 솜씨가 일취월장해서 지금은 수준급이다.대엽종 차나무 잎으로 발효차를 만들어 야크의 젖에 섞어 먹는 수준이었다. 차라고 말하기 어려운 정도의 품질이었는데 아직 한 봉지 기념으로 갖고 있다. 훗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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