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의 詩 산책-아름다운 석양 대통령님께
김지율의 詩 산책-아름다운 석양 대통령님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1.01 19:0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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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

김지율/시인·경상대 강사-아름다운 석양 대통령님께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 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땡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신동엽 ‘산문시(散文詩)1’ )

새해를 시작하는 마음이 조금 부산스럽기도 하고 유유하기도 합니다.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던 시인의 긴 산문시를 읽으며 우리가 바라는 희망들이 껍데기에 그칠지라도 여전히 그 꿈들에 또 희망을 걸며 한 해를 시작합니다

시인은 꿈꿉니다. 대통령이 딸아이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칫솔 사러 가는 나라, 광부들도 여유롭게 책을 읽는 나라, 국무총리가 서울역 삼등대합실 뙤약볕 아래 줄 서서 기다리는 나라, 농민과 노동자가 모두 풍요로우며 대통령 이름은 모르지만 꽃과 새 이름은 아는 나라. 그런 권위와 특권의식이 없는 평등한 나라를요.

그런 나라가 실제로 존재하건 그렇지 않건 몇 십 년 전에 씌어졌던 이 시는 적어도 지금 이 시대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치인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자연과 문화를 더 소중히 생각하며,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여 평화에 대한 신념을 끝까지 포기하는 않는 나라, 그런 나라를 시인 신동엽은 희망하고 꿈꾸었습니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맞는다는 말은 아프고 부끄러운 말입니다. 한 표에 희망을 건 사람들에게 그 희망을 상상할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면, 권력은 돈과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사람들과 소외된 변방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일 테지요.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를 실고 시인의 집에 간 대통령은 그와 나란히 앉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대통령이 하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시인’을 찾았을지 조용히 생각해 보는 아침입니다. 참으로 어렵고 외로운 길이 진정으로 옳은 일이라면 가끔은 정치도 시를 닮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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