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이웃과 나누는 사랑의 손길 무소유 자비의 삶
소외이웃과 나누는 사랑의 손길 무소유 자비의 삶
  • 김영우 기자
  • 승인 2012.04.26 2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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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원 동봉 스님

▲ 동봉스님이 지난해 4월 마련한 경로위안잔치에서 참석한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와 이웃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 삶은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삶이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하나로 느끼는 순간에 이 동체자비는 실현되며, 그 것은 다름 아닌 자비의 삶이다. 여기에 '무소유'를 더한다면 그것은 '무소유의 자비정신'이다. 진주시 상봉동 소재 여래사(원)의 동봉스님은 바로 무소유의 자비정신과 삶을 몸소 실천하며 지역의 크고 작은 일에 부처님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 진주지역 어르신은 물론 불우 청소년, 재소자 등 중생이 있는 곳 치고 동봉 스님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구석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의 자비실천은 무한이다. 스님은 특히 전통에 대한 소중함을 각성해 지금도 절을 찾는 신도들과 일반시민들에게 그 깨달음을 일깨우는 선도자 역할을 하면서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부처님의 가피를 30년 넘게 몸소 실천하고 있다. 27일에도 진주학생실내체육관에서 진주지역 어르신 2000여명을 초청해 18번째의 시민경로위안잔치를 마련한다. 경로잔치 준비에 바쁜 스님을 여래원에서 만나 부처님의 자비정신과 봉사정신에 대해 들어 보았다. <편집자주>

-30년 넘게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펼쳐오고 계시는데 그동안 해오신 주요 봉사활동을 소개해 주십시오.

▲1971년 의곡사 주지를 맡으면서 부모없이 생활하는 고아들과 학업성적이 우수한 중고교 불우학생,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조달하고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또 돈이 없어 도시 구경을 하지 못하는 낙도 어린이들을 진주로 데려와서 개천예술제를 구경시키는 행사도 연례적으로 했지요. 지금도 불우 학생 10명에게 매년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1979년부터 어르신들을 위한 시민위안잔치를 열어 어르신들이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올해도 진주학생실내체육관에서 행사를 마련합니다. 또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생일상 차려드리기 행사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1975년부터 재소자들과 인연을 맺어 이들을 위해 매년 교화활동과 위문공연, 명절 위문과 함께 영치금 넣어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경로위안잔치를 해마다 거르지 않고 하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물론 경비도 많이 들고 여러가지 준비할 것도 많아 고생은 되지만 어르신들이 비록 하루지만 즐겁게 노시는 모습을 보면 해마다 또 하게 됩니다. 처음 시작은 절에 들어오는 수입을 유효적절하게 사회에 환원시키자는 측면에서 하게 됐는데 해가 갈수록 어르신들에 대한 봉사에 대한 의무감이 생깁니다.
70년대 제1회 사진을 보면 참가 어르신 대부분이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비녀를 꽃고 있는데 당시의 우리 생활상이 그랬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어르신들의 놀이문화가 없었던 시절이었고, 공업화정책이 시작되면서 핵가족문제가 막 제기되던 싯점이었습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어르신들에 대한 경로효친사상을 고취시켜야 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경로잔치가 어느덧 30년이 흘렀습니다. 그때 제가 30대 초반이었는데 저도 지금은 늙어 빠진 어르신이 됐습니다. 허허.
-어르신들에 대한 애정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 대한 사랑도 남다른데요.
▲저는 아이들을 무척 사랑합니다. 제가 의곡사 주지를 할 당시만 해도 돈이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부지기 수였습니다. 농촌에서 진주지역 명문학교에 어렵게 시험이 돼도 돈이 없어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당시 하동 양보 출신의 한 학생이 진주고에 합격했는데 돈이 없다는 기사가 지역 언론에 실려 있는 것을 보고 그 길로 그 학생을 절에 데리고 와서 키우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아이들 수가 13명 정도까지 늘어났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도시락 13개를 싸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지만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아이들 10명가량을 목욕탕에 데리고 가면 '스님에게 웬 아이가 이리도 많느냐'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당시 키운 아이들 중에서 4명은 출가를 했고 나머지는 모두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동량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동 양보 학생은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그룹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70년대초에는 육지를 모르고 살아 온 거제도 학동과 남해 창선 아이들을 개천예술제때마다 데려와 구경을 시켜주곤 했는데 당시 이 일이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제가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재소자와의 인연은 어떻게 해서 시작됐습니까.
▲70년대 당시 진주교도소가 상봉서동에 있었는데 떡이 귀할 시기였지요. 명절을 맞아 집에 가지 못하는 재소자들을 위로하겠다고 떡을 해서 교도소를 갔는데 마침 합천 출신 젊은 재소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게 됐습니다. 교도소장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 재소자는 벌금대납을 못해서 형을 사는 딱한 형편이었습니다. 당장 벌금대납을 해주고 그날 바로 이 재소자가 석방됐는데 그 사람은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 때 ' 아 이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어야 겠구나' 결심했는데 그것이 교도소 재소자들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교화활동을 위문공연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출소 후 재범을 하지 않고 갱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출소자의 직업을 알선해 주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스님이 하시는 봉사활동은 많은 재정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것들인데 재원은 어떻게 조달하십니까.
▲저의 봉사활동은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봉사활동을 위한 경비마련을 위해 따로 돈을 마련하지는 않고 절에 들어오는 모든 수입으로 이를 충당하고 신도회의 도움도 일부 받고 있습니다. 초파일 등 수입과 49재 수입, 그리고 제가 다니면서 법문을 해서 보시 받은 돈 모두가 경비에 포함됩니다. 경로잔치와 생일상마련, 장학금 지급, 교도소 교화사업 등을 모두 합치면 연간 6000여만의 경비가 들어간다고 보면 됩니다. 신도회에서 1000만원 가량을 지원받고 나머지 경비는 절 수입으로 모두 충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도들의 모임인 불국정토회는 10년 전 결성돼 처음에는 인력봉사만 하다가 제가 하는 일이 너무 힘든 다고 해서 뜻을 모아 일일찻집을 시작했는데 주위에 부담도 주고 해서 5년전부터 생강차를 만들어 판매한 수익금으로 장학금에 보탬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불국정토회에서 장학금 전액인 450만원을 보태주고 있어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진주불교사암연합회 회장직을 맡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주에만 430개의 사찰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해인사에서 직접 관장하는 절은 응석사와 청곡사 등 7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누가 해인사 주지와 연관이 좀 있다고 사암연합회 회장직에 손을 대서 파벌이 생긴 겁니다. 진주지역에 조계종 사찰만 있는게 아닌 만큼 다른 사찰 소속 스님들의 반발이 일어나면서 표 대결까지 해서 두 차례 회장 스님을 선출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 째 선출된 회장스님이 기반이 없어 흔들리다 보니까 저를 추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후 사암연합회 관계자들이 10차례 정도 저를 찾아와서 사암연합회의 자리가 잡힐 때까지 2년간만이라도 맡아달라고 해서 억지로 맡게 된 것입니다.
-성전암 문제로 진주 불교계가 한동안 시끄러웠는데 이 사태에 대한 스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자면 서로의 욕심 때문에 빚어진 일이 아닌가 보여 집니다. 저도 나름대로 알아보니 성전암 복원문제는 허가가 안난 것이 아니고 공사중지 명령이 내린 것이었습니다. 공사중지 명령이 내려진 것은 절차상 하자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가 지금도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에 허가를 내줘서 고찰이 복원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니 시는 그 곳은 경사지가 심해 위험이 따르고 당초 허가규모하고 다르게 지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천년고찰 복원은 당연하지만 도량이라는 것은  굳이 크기에 집착할 필요가 있었느냐 하는 점에서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여튼 양측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하심(마음을 낮춤)을 했으면 문제해결이 더 쉬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제 초파일이 한 달가량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초파일에 등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등의 불빛은 광명입니다. '빈자일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시던 절에서 신도들이 많은 등을 달았는데 새벽에 보니까 모든 등이 꺼졌는데 유일하게 꺼지지 않은 등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궁금해서 부처님께 물어 보니 '가장 가난한 사람이 켠 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가장 지극정성을 들여 등을 달았기 때문에 불이 꺼지지 않았는데 그것이 가난한 자의 등 하나, 즉 '빈자일등'입니다.
부처님 오신날에 등을 다는 것은 이러한 빈자일등의 정신으로 고해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에게 밝은 빛을 선사해 세상을 사는 중생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오신날 등을 밝히는 이유입니다.
-불교계나 시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조계종단에는 출가 후 일생동안 수행과 포교를 한 스님들이 마지막 남은 생을 마감할 때 의탁할 곳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단에서는 실버타운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라고 봅니다. 큰 절에 있는 빈방 하나씩만 주면 됩니다. 해인사에는 비어 있는 방이 많습니다. 진주지역 사찰도 보통 스님 한 두 분 기거할 수 있는 여유공간이 있습니다.
지금 현실은 스님들이 주지 발령받아 나가면 절 크게 짓고 공사 크게 해서 외형적인 것만 쫓아 가는 형편입니다. 큰 절에 가보면 외형만 화려하고 절에 스님이 없습니다. 결국 사람을 위해 쓰여질 돈들이 절집의 화려하고 외형적인 치장에만 흘러가니 잘못된 것이라는 겁니다. 절 규모가 적고 부처님을 적게 모셨더라도 사회에 봉사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불교가 가야할 길입니다. 결국 스님의 마지막 화두는 봉사였다.

동봉스님은

동봉스님은 19세때인 1958년 깨침의 길을 찾아 출가 한 후 해인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하고 1975년 동국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창원 의림사 주지(1970년) 진주 의곡사 주지(1971년), 울산 신흥사 주지(1985년), 합천 해인사 총무스님(1994년), 진주 여래사(원) 주지(1994~현재)로 재직하면서 불국정토를 이루고자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30년이 넘게 소외이웃을 위해 각종 봉사활동을 펼쳐 온 스님은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도지사, 행자부장관, 법무부장관 표창을 비롯해 2008년에는 제8회 진주시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불이문(정토를 두고 고해를 가다니)'와 '당신의 뜻이라면 지옥인들 못가리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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