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말과 글의 사랑에 목숨을 걸던 때
시론-말과 글의 사랑에 목숨을 걸던 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2.10 19:3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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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말과 글의 사랑에 목숨을 걸던 때


현재 상영 중인 영화에 <말모이>란 것이 있다. 지난 1월 9일 개봉했고 2월 초까지 누적 관객 30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한글 말살정책이 극도에 달했을 때다.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데 명운을 건 사람들이 등장한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는 명대사다. 그런데 정작 관객들을 감동하게 하고 눈시울을 훔치게 하는 힘은 그러한 당위적 논리보다 이를 묘사하는 인물들의 아프고 슬픈 가족애요 인간애에서 온다. 모든 명편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정서적 감응력이 앞서면 이론적 설득력은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영화 제목 ‘말모이’는 ‘우리의 말과 마음을 모은다’라는 뜻으로, 그 정치적 혹한의 시기에 조선어학회가 편찬하고자 했던 사전의 이름이자 사전에 수록될 말을 모으는 운동이었다. 영화 밖 실제의 의미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주시경 등이 1910년 무렵에 조선광문회에서 편찬하다 끝내지 못한 사전’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57년, 조선어학회가 여섯 권으로 완간한 <큰사전>의 원고가 이 ‘말모이’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은 1938년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인데, 그 이후 지금까지 1999년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비롯한 여럿이 있다.

오늘에 와서는 남북한이 함께 편찬하는 <겨레말큰사전>이 진행 중이다. 이는 국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고 있으니, ‘말모이’가 당대의 극단적인 탄압과 희생을 감수한 데 비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형국이다. 영화 속 탄압은 우리말이 점점 사라져 가던 1940년대 경성을 무대로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극장 안내원에서 해고된 후 아들의 학비 때문에 가방을 훔치다 실패한 판수(유해진 분), 그가 직업을 얻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간 조선어학회의 대표가 가방 주인 정환(윤계상 분)이다. 사전을 만드는 데 까막눈인 전과자를 채용한 터이다. 이 궁벽하고 어색한 만남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반전을 이끌어낸다.

판수의 좌충우돌 역할은 그가 난생 처음으로 글을 깨치고 우리말의 소중함에 눈뜨는 과정을 통해 말과 글이 어떻게 민초들의 가슴을 적시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지식인의 화려한 변설로 견인할 수 없는 감격, 총칼 앞에 목숨을 던지는 자기희생의 사명감이 거기에 있다. 판수의 천진난만한 어린 딸, 일제의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중학생 아들은, 이것이 우리 가족과 민족공동체의 이야기임을 환기한다. 그 엄혹한 시기에 일제의 감시와 압박에 맞서서 이러한 용기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시대사의 장면들이다.

말과 글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인 곧 그 시대의 문인들은, 대체로 일제의 겁박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침묵을 지키고 절필(絶筆)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극히 소수의 문인이 읽혀지지도 출간되지도 않는 작품을 은밀하게 쓰면서 모국어를 지켰다. 작가 황순원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일제 말 암흑기에 써서 석유상자 밑에 숨겨두었던 작품들을 묶어 해방 후에 <기러기>라는 단편집을 상재한다. 그런데 이 ‘소극적인’ 저항운동의 연원(淵源)이 만만치 않다.

그의 부친 황찬영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였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일로 1년 6개월 옥살이를 했으며, 황순원 자신도 첫 시집 <방가>를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해 동경에서 간행한 일로 29일 간 구류를 살았다. ‘말모이’나 여러 국어사전, 그리고 황순원 문학은 모두 외세의 부당한 억압 속에서 민족의 정신과 말과 글을 수호한 ‘지킴이’였고, 올곧은 저항정신의 시대적 표현이었다. 이 영화를 ‘강추’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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