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최효근·최갑환의 항일투쟁사
진주성-최효근·최갑환의 항일투쟁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2.20 18:55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최효근·최갑환의 항일투쟁사


최효근(崔孝根)선생과 최갑환(崔甲煥)선생의 항일투쟁사를 기술해 본다. 최효근 선생은 사천시 동리 171번지가 본적지(本籍地)이며 1909년 6월 2일생이다.

일제의 소위 문화통치가 끝나고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단속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천.고성 지역은 해안(海岸)지역으로 일제가 만약을 대비해 도주로(逃走路)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지역보다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최효근·최갑환 선생 등 청년들은 집회 허가를 받지 않고 활동하다 1929년 8월 16일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1929년 10월 20일 최효근·강일산·황달봉·박영수·강몽우 등은 사천청년동맹 삼천포지부 이름으로 창립대회를 개최하려고 신고했으나 허가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인쇄물 45매를 만들어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내용을 배포하다 피체되어 집행유예(執行猶豫) 언도를 받고 석방되었다.

삼천포 외곽에 있는 토지를 소작하는 소작인과 친일기업 동양척식(주)간 소송 문제가 발생하자 소작인 편을 들게 되는데 최갑환. 최효근, 김기현 등과 함께 반대로 소송(訴訟)을 당하고 말았다.

1932년 최효근·정한영·황달봉·배장영 외 28명은 권대형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재건협의회 사천 야체이카 박대영(이금복 투사의 전 남편)의 지도를 받아 비밀회의를 개최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전기회사와 석탄하역 인부들에게 동맹파업(同盟罷業)을 하도록 지도하다가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拷問)을 받고 1933년 1월 31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이 언도되어 옥고(獄苦)를 치렀다.

최갑환 선생은 고성군 하일면 학동에서 1909년 12월 29일생으로 임진공신으로 의민공 시호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최균의 14세손이고 최순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래고보 재학 중 동맹휴교로 정학처분을 받고 결국 퇴학처분을 받았다.

삼천포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친일기업 동양척식(주)와 소작인 간에 소송할 때 소작인(小作人) 편을 들다가 업무 방해죄로 재판을 받았다.

양산 통도사에 입산하여 불교전문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광복(光復)이 되자 귀향하였다.

1946년 한국 민주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1954년 향리에서 제 3대 민의원(국회)에 당선되어 큰 활약을 했다.
최효근 선생의 후손은 사천시 인근에 거주하고 최갑환 선생의 아들은 최재구 전 국회의원이고 손자는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