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600년 전 시인에게 오늘의 길을 묻다
시론-600년 전 시인에게 오늘의 길을 묻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2.24 18:2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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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600년 전 시인에게 오늘의 길을 묻다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그렇게 춥지 않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어서, 절기는 우수를 지나 경칩으로 가고 있다. 알베르 카뮈는 ‘여름’이란 산문에서 “겨울 한복판에서 결국 나의 가슴 속에 불굴의 여름이 있음을 안다”고 썼다. 이 반역적 상상력과 더불어 엄동설한의 시 한 편을 떠올려 본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익히 알려진 성삼문(1418-1456)의 옥중시조다. 세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던져 절조를 지켰다. 유학의 정명주의(正名主義)를 그 정신으로 확립하고 또 육신으로 체현한 하나의 전범, 그러기에 이 시조에는 ‘투사 성삼문’의 면모가 약여하다.

그런데 다음의 오언절귀 시 한 수를 더 읽어 보자.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서풍일욕사(西風日欲斜)/ 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한글로 풀어쓰면 이렇다. 북소리 내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녘 바람에 지는 해가 기울어가네/ 황천으로 가는 길에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어디서 잠을 이룰고. 성삼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순간에 남긴 절명사(絶命詞), 곧 임사부절명시(臨死賦絶命詩)라 알려진 한시의 명편이다.

이 이름 있는 시문 가운데 앞서 시조에서 보았던 ‘투사 성삼문’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숨이 막히도록 처연하고 감회가 넘치는 시의 문면에 ‘시인 성삼문’만 남아 있다. 시인 성삼문이 있고서야 투사 성삼문이 가능하리라는 인문적 사고와 정신주의의 개가(凱歌)! 우주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탈속의 수준에 도달했다면, 실제적 삶의 태도와 행위는 오히려 명료하고 유연할 것이다. 모든 기능과 방법은 사고와 인식의 결과다.

시인 성삼문의 유학적 세계관이 어느 순간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것이 갖는 자기 체계의 지속성 아래 투사 성삼문은 그 부분집합에 해당한다. 이때의 시인은 대개 투사일 수 있으되, 투사가 모두 시인이기는 어렵다. 참으로 감당하기 벅찬 상대는,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단기 목표에 시선을 두지 않고 성삼문이 가졌던 그 확신에 명운을 거는 사람이다. 이러한 시인으로서의 수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투사가 되는 일은 바늘 가는 데 실 가기다.

우리가 함께 형성하고 있는 공동체의 미래에 푸른 등불을 내거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고색창연하지만 여전히 효용성이 큰, 투사와 시인을 함께 바라보는 중용의 미덕을 오늘의 삶에 적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상호배타적이면서도 동시에 보족적인 개념을 대입하여,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현실의 면모는 너무도 많다.

한국 현실 정치는 가파르게 ‘투사’의 길로 치닫고 있다. 그 길에 선 이들의 눈에는 전의(戰意)만 가득하다. 여야 상호간의 관계는 고사하고, 각 정당 내부의 국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민을 바라보며 소통과 조정이 작동해야 할 자리에, 이를 가능하게 할 ‘시인’의 국량(局量)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해묵은 우리 정치의 숙제다.

한국 경제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외면했다. 극심한 빈부 격차와 소득의 불균형 현상이 저소득층의 몰락과 중류계급의 파산을 선고했다. 중산층의 경제 활동이 살아 있고 그 층이 두터워야 건강한 사회 구조를 형성한다. 우리 경제가 성장 동력보다 더 공들여 보살펴야 할 지점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 곳곳에 이와 같은 양극화 현상이 편만해 있다. 그 완충장치로서의 존중과 배려가 ‘투사’에게는 없다. 그러기에 인문적 상상력과 정신주의의 포용력을 거느린 ‘시인’을 되살리는데 모두가 인식의 초점을 같이해야 할 때다. 그러고 보면 600년 전 시인의 시 한 편을 주의 깊게 읽는 일이 단순한 한겨울의 소일거리가 아닌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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