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끌어내리기즘’과 ‘끌어주기즘’
아침을 열며-‘끌어내리기즘’과 ‘끌어주기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2.27 19:3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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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끌어내리기즘’과 ‘끌어주기즘’


아주 많지는 않지만 주변에서 아주 괜찮은 인재를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인재를 우러러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을 위해 기여하기를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된다. 그가 이른바 ‘후생’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참 묘하다. 우리사회에서는, 아니 인간세상에서는 그런 인재가 반드시 그 훌륭함을 인정받고 그 자질을 꽃피우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 즉 그 훌륭함을 무시하고 심지어 짓밟아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내가 아는 후배 A는 유럽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와 학회에서도 그 실력을 과시했지만 결국 자리를 얻지 못하고 좌절했다. 그는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또 내가 아는 선배 B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해외의 초명문대학에서 오래 교수생활을 했지만 그 좋은 조건을 버리고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작 고국에서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자리조차 얻지 못했다. 그는 지금 강원도에 칩거하며 혼자 문필활동으로 의미를 삼고 있다. 그들의 자질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하고 좋은 자리는 엉뚱한, 시시한, 그러나 요령있는 인사들이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찮은 그들’은 자기네끼리 패거리를 이루어 서로 끌어주고 세상의 과실을 나눠먹는다. 그 결과는 불문가지다. 부실은 필연인 것이다. 학교도 회사도 나라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 데서는 진정한 발전과 번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끌어내리기 내지 짓뭉개기-짓밟기는 많은 경우 욕심과 시기-질투에 기반하고 있다. 훌륭한 인재의 훌륭함을 인정하면 상대적으로 자신의 모자람-저급함이 드러날까 두렵고 이익을 빼앗길까 두려운 것이다. 그런 두려움이 ‘니까짓 게...’ 라는 무시로 나타나며 그게 행위화되어 짓뭉개기-짓밟기-끌어내리기 혹은 싹자르기로 이어진다. 무시하기즘-깔보기즘-짓뭉개기즘-짓밟기즘-끌어내리기즘-싹자르기즘[잘라버리기즘], 이런 것을 우리는 저질이라고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삶의 고양을 바란다면, 좋은 인간, 좋은 나라, 좋은 세상을 바란다면, 우리는 저질과 반대되는 고상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적인 고상함은 명품을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상한 인간’이 되는 데서 가능해진다. 고상한 인간은 ‘인격’의 소지자다. 인격의 핵심은 타자에 대한 태도의 여하에 놓여 있다. 타자에 대한 존중, 특히 타자의 훌륭함에 대한 인정에 인격이 있다. 그 적극적-실천적 형태가 다름아닌 ‘끌어주기’다. 훌륭한 타자의 그 훌륭함이 아름답게 찬란하게 꽃피울 수 있도록 자신의 역량을 동원해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키우기즘-기르기즘-북돋우기즘이라 불러도 좋다.) 그 기준이 오직 ‘객관적인 훌륭함’에 있는 것이 진정한 인격인 것이다. 그 기준이 ‘연줄’이나 ‘이익’이 아닌 것이다. 지연 학연 이념 … 그런 것이 아니고 패거리의 이익이 아닌 것이다.

이를테면 장영실의 자질을 알아보고 이끌어준 세종의 태도, 이순신을 알아보고 이끌어준 유성룡의 태도, 정약용의 자질을 알아보고 이끌어준 정조의 태도, 이병철-정주영-박태준의 자질을 알아보고 키워준 박정희의 태도, 문재인을 알아보고 키워준 노무현의 태도, 그런 것은 자신이나 패거리의 이익과는 무관한,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바로 그런 것이 인격이고 고상함이고 훌륭함인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이런 인물들에 대해서조차도 ‘니까짓 게…’ 하면서 눈에 쌍심지를 돋운 인사들이 없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의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를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전적인 선도 전적인 악도 있을 수 없다. 세종에게도 유성룡에게도 정조에게도 박정희에게도 노무현에게도 흠결은 있다. 장영실, 이순신, 정약용,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에게도 흠결은 있다. 그건 인간인 이상 불가피하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인간의 훌륭함이 더욱 가상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그 훌륭한 부분을 끌어주어 꽃피우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인격과 고상함이란 연꽃과 같아서 진흙 위에 피어나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의 훌륭함이란 그런 것이다. 그걸 나는 ‘유한 속의 무한’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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