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 3·1운동은 종소리로 시작
진주성-진주 3·1운동은 종소리로 시작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2.27 19:3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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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 3·1운동은 종소리로 시작


진주3·1운동은 교회 종소리로 시작한 근거가 확실하고 많다. 첫 째로 고등경찰이 상부로 보고한 문서를 모아 만든 <고등경찰관계적록>에 보면 “주모자들이 3월 18일 낮 12시 교회 종을 치자 진주시내에서 일제히 만세 소요가 있었고 일만여 명이 모여 시위했다”라고 기록했다.

진주법원 재판기록은 1949년~1950년 사이에 완전히 소실되었고 대구복심법원 재판기록이 남아있는데 읽어 보면 3월 18일이 아니고 3월 19일 낮 11시에 악기는 대안동 시위대 앞에서 행진할 때 사용되었다고 기재되었다.

3월 19일 오전 11시 큰 북, 작은 북, 코르렛, 나팔이 동원되어 대안동 일원에서 행진할 때 사용되었으므로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오래 박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광복 후 처음으로 만든 <경남남도지> 812면 이후에 보면 항일투사 이기주 선생이 기록하면서 진주 교회 종이 정의의 소리라고 표현하는 등 교회 종소리가 큰 역할을 했음을 밝혔다.

진주 3·1운동을 지도하고 1년 수개월간 옥고를 치른 한규상 선생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교회>라는 책에서 교회 종을 치면서 신호용으로 사용했음을 기록했다.

수십 년간 교회 집사(執事)직을 수행했고 적십자병원장. 한일의원장을 지낸 분이 아무 소득 없는 일에 대하여 교회 종소리가 아닌데 신호용이라고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나는 한규상 선생의 양심적 기록을 믿는다.

만약 교회 종이 철거된 것을 발견하고 “야단났네”라고 외치며 상의한 다음에 악기를 찾아와서 산으로 올라가는 일은 시간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시내에는 엄중한 경계와 검문이 실시되고 시위 군중들은 장대에 태극기를 달고 독립선언서와 교유문, 격문을 수백 장씩 들고 신호를 기다리기 2시간 정도 대기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나팔을 불었다는 이영규 선생의 대구감옥 집행지휘서(執行指揮書)에 의하면 “피고는 3월 19일 오전 11시경에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진주읍 평안동과 대안동 중간 노상에서 이미 압수된 악기를 울리며 기세 당당히 태극기를 흔들며 소요를 일으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치안을 방해하였다”라고 했다.

집행지휘서에 비봉산 나팔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영규, 박성오, 천명옥, 김영조 등 4명은 3월 19일 오전 11시경 큰 북. 작은 북. 코르넷. 나팔을 치고 불면서 시위 군중을 지도했다. 1919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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