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독립운동가 이재명을 아시나요?
칼럼-독립운동가 이재명을 아시나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04 19:1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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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독립운동가 이재명을 아시나요?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여 17세 때인 1904년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을사조약 소식을 듣고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1907년 귀국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그와 동지들은 학생으로 변장하여 이날 새벽부터 성당부근에 대기했다. 마침내 오전 11시 30분께 인력거를 탄 이완용이 나타났다. 이완용을 칼로 여러 차례 찌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가 휘두른 칼끝은 이완용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특히 왼쪽 어깨로 들어간 첫 번째 칼은 폐를 관통하여 반죽음상태에 이르렀다. 이완용이 받은 수술은 한국 흉부외과 수술 1호가되기도 했다. 그를 수술한 의사는 “외과 기술이 10년 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날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완용이 피습당한 뒤 고종과 순종은 거액의 위로금과 함께 하루도 빠짐없이 시종(侍從)을 보내 문안을 물었다. 아울러 일본에서도 고위 관료들이 줄지어 병원을 찾아 위로금을 보냈다.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에 공을 세운 대가로 이토의 추천을 받아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오른다. 한 달 뒤 총리대신으로 복직한 이완용은 8월 22일 ‘한국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적으로 일본에 넘겨준다’는 한일합방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4일 뒤인 8월 26일 순종황제로부터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받는다. 나라를 팔아넘긴 공로의 의미였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습격한 직후 일본 순사에 붙잡혀 이완용의 집으로 끌려갔다. 이때 이완용과 함께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선 농무대신 조중웅이 이재명을 보자 소리쳤다. “네가 흉한이냐?”그러자 이재명은 “너 따위 역적 놈이 감히 나에게 너라고 하느냐?”하고 호통으로 맞받았다. 동지 12명이 피의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장: 순사가 경호하는 데도 네가 목적한 뜻을 수행하여 이완용이 죽었다고 알았는가? 이재명: 나는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잡혔다. 재판장:너는 권총을 지녔는가? 이재명: 가졌다. 재판장: 다수의 공모자가 있는가? 이재명: 나 혼자다. 재판장: 왜 이완용을 살해하려고 했는가? 이재명: 이완용을 죽일 죄목은 허다하나 8개조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일과 조선통감부를 우리나라에 설치케 한 일. 둘째, 헤이그 특사로 인하여 황제 앞에 3차에 걸쳐 협박하여 양위케 한 일. 셋째,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과 또한 군대를 강제로 해산케 한일. 넷째, 어린 황태자(이은)를 일본에 인질로 보내고 또한 일본 여자와 정책적인 결혼을 시킨 일. 다섯째, 고종을 일본에 건너가게 획책한 일. 여섯째, 황제를 강제로 서북지방을 순행케 한 일. 일곱째, 사법권을 일제에 넘겨 애국지사를 처벌케 한 일. 여덟째 표면적으로는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을 합병케 하기 위하여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시켜 합병케 한 일.

재판과정에서 보여준 이재명의 의협심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재판장을 향해 호통 치면서도 동지들을 위해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재명의 진술에 따라 방청객은 숙연해지기도 했고, 때로는 박수도 쏟아져 나왔다. 재판장: 피고와 흉행한 사람이 몇 명이냐? 이재명: 이 야만 섬나라의 무식한 놈아! 너는 흉(兇)자만 알지 의(義)자는 모르느냐? 나는 강도와 같은 너희들을 몰아내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네놈들의 앞잡이를 처단하려는 의행(義行)을 한 것이다. 재판장: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이재명: 2000만 대한민국 모두이다.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키고 재판청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1910년 5월 18일 이재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재명은 이 자리에서 일본 재판장을 향해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의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고 경고했다. 결국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재명은 의거 9개월 여 만인 1910년 9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나라를 강탈한 외적의 수괴가 이토 히로부미라면, 나라를 판 내적의 수괴는 이완용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23세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사후 52년이 지난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3·1절을 맞아 투사를 한 번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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