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천명옥 진주 3·1운동 유공자
진주성-천명옥 진주 3·1운동 유공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06 18:5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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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천명옥 진주 3·1운동 유공자


천명옥 선생은 진주시 비봉동 150번지 출신이다. 3·1동지회에서 1963년 5월 20일에 진주시에 보고한 문서에 의하면 1895년 5월 25일생이고 거주지는 진주 봉곡동 255-6번지에 거주한다고 보고되었다.

1919년 3월 10일 진주시내 곳곳마다 격문이 나붙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격문을 휴대하고 내려 온 김재화, 박진환, 박대업, 심두섭 등은 여러 동지들이 김재화 집에서 비밀 모임을 갖고 3월 18일 진주시내 다섯 장소에서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시위할 때 광림학교 출신 악대원들 이영규, 정성오, 김영조 등 4명이 시위대 앞에서 큰 북, 작은 북, 코르넷, 나팔을 치고 불면서 시위를 진행하게 되는데 3월 18일은 참여하지 못하고 3월 19일 낮 11시에 시내 대안동과 평안동 사이 도로변에서 동참하게 된다.

조선독립이라 쓴 깃대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동지들이 큰북을 칠 때 천명옥 선생은 코르넷을 불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구복심법원 판결문과 정성오 선생의 대구형무소 재소자 기록에서 확인된다.

대구형무소 윤달수 서기가 쓴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피고 정성오 등은 3월 19일 오전 11시경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진주 평안동과 대안동 –노상에서 악기를 울리고 기세 당당히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쳤고 치안을 방해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악대원들은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1919년 12월 18일 대구감옥에서 출옥하였다.

천명옥 선생은 출옥하자 곧 진주청년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1920년 9월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한 격문을 가지고 각 시.군으로 출발하려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피체되었다.

동아일보 1922년 9월 22일자에 천명옥은 일본 유학을 떠날 때 사봉면 출신 정재화 지주의 지원을 받아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보도되었다.

청년회 악대원들은 수해민을 돕기위해 경남전역으로 다니며 순회 공연을 실시하였다. 이들의 노고를 환영하기 위해 시내 경성관에서 심두섭. 정준교. 박태홍. 강대익 등이 환영위원이 되어 위로했다.

1926년경에는 진주청년회관 1층에 설치된 진주유치원에서 오경표와 함께 교사로 10여 년간 근무한 공적으로 감사장도 받았다.

악대원들 이름과 공적은 필자가 건립추진위원장이 되어 진주항일투사추모비에 깊이 새겨 두었다.

부인은 강순경이고 딸의 이름은 천해순인데 그 후 행적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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