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영웅의 숨결
아침을 열며-영웅의 숨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12 17:0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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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국학원 상임고문·한민족 역사학문화공원 공원장
장영주/국학원 상임고문·한민족 역사학문화공원 공원장-영웅의 숨결

3월은 3·1절과 임시정부의 수호자 석오 이동녕 선생(1869~1940),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순국일이 걸쳐 있다.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한 안중근의 곁을 끝까지 지킨 동지가 있다. 충북 제천 출신의 우덕순으로 그는 ‘노우키에프스크’에서 안중근·김기열 등과 함께 손가락을 끊어 결사보국을 다짐하고 히로부미 처단에 동참한다. 우덕순은 “안중근과 나는 동갑인데 내가 2월생이고, 안은 5월생이다”라고 술회한다. 거사 직전, 두 사람에게 거사자금과 권총을 건네 준 사람은 유진율과 이강이다. 유. 이 두 사람은 “지금 삼천리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하고 돌아서서 눈물을 떨구었다. 천재일우의 막중한 사명을 반드시 성공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채가구 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두 겹으로 거사하기로 정밀하게 전략을 짜고 숙의 한다.

첫 번째, 먼저 이토 히로부미를 쏘고, 두 번째, 쏘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를 것, 세 번째, 될 수 있는 대로 생포되어서 억울한 사정을 외국에 선전할 것 등을 결의한다.

결국,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 파괴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에 성공한다. 그런 뒤 재판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통렬한 언변으로 전 세계에 전하고 꼭 5개월 후인 다음해 3월 26일 순국하신다. 아직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 중이었고, 일제는 그 원고가 완성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할 것을 약속했던 터이었다. 일제는 왜 하필이면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인 26일에 형을 집행하였을까? 그날 오전 중국 요녕성의 여순(旅?)형무소 사형 집행실에서 안중근께서 유언하신다.

“내가 행한 행동은 오로지 동양평화를 도모하려는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바라건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들도 나의 변변치 못한 충정을 잘 헤아려, 너와 나 구별 없이 마음을 모으고 협력해서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야흐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는 적군들에게 마지막으로 ‘너나 없는 참된 동양평화’를 이루라고 남은 목숨의 분과 초를 살려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얼마나 겸손하고, 얼마나 호방하며, 얼마나 간절한 인품인가. 백범 김구 역시 평생을 이런 기백과 신념으로 일관하였다.

1894년,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20리를 사이에 두고 동학군 토벌 대장인 안중근의 아버지 진사 ‘안태훈’과 적이 된 동학의 애기접주 ‘김구’는 바야흐로 생사를 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열아홉 살의 젊은 동학대장 김구의 사람됨을 알아본 안태훈은 밀사를 보내 회유하여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맺는다. 쫓기는 김구를 안태훈은 자신의 집에 피신시킨다. 안태훈의 장남이 바로 ‘안중근’으로 김구보다는 3살 연하이었다.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를 아끼는 안태훈의 마음이 높고도 호방하다. ‘적’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생명의 은인 안태훈의 인물됨을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그린다. ‘안 진사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안 진사를 악평하던 자들도 얼굴만 마주하면 부지불식간에 경외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관찰로도 그는 퍽 소탈하여 교만한 빛 하나 없이 위아래 모두 더 불어 함께 하길 좋아하였다. 맏아들 중근은 당년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총열이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영특한 기운이 넘치고 군사들 중에서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혔다. 늘 넷째 삼촌 태건과 동행했는데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였다’ 안태훈은 가훈을 ‘정의’라고 정했고 맏아들인 안중근은 자연히 그 바른 정신이 날래고 용감한 몸에 배었을 것이다. 14년 뒤, 하얼빈 역에서 덩치 큰 러시아 군인들 사이로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움직이는, 얼굴도 모르는 적장을 정확하게 저격한 안중근의 예지력과 사격술은 이미 어릴 때부터 몸에 익혀져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 안중근 의사라고 하면 병원의 의사로 아는 젊은이들도 많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도모하여 목숨을 걸고 성공한 사람은 이봉창의사. 윤봉길 의사처럼 의사(義士)라고 한다. 그러나 유관순처럼 애석하게도 성공하지 못한 분은 열사(烈士)라고 한다. 그런 구분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의사와 열사의 마음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곧 나라를 지켜내신 영웅들과 이름 없는 분들의 숨결과 마음을 바르게 전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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