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바담풍 말고 바람풍으로 하자
진주성-바담풍 말고 바람풍으로 하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13 15:4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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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바담풍 말고 바람풍으로 하자

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나는 바담풍 하더라도 학생들에게 바람풍이라고 바르게 발음하라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국. 경남 일원에서 행사를 진행하면서 잘못된 통계를 가지고 고집하며 다른 이들은 모두 틀렸다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1910년대 지방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일제가 철저하게 조사 확인한 통계에 따라 진주군 인구가 9만 548명(1만 8831가구)으로 일본인 2만 2980명은 별도로 해도 약10만 명이다. 하동인구 5만 4518명. 사천 2만 5318명. 곤양 2만 5258명이다.

그 당시 전 국민의 80%이상이 농민·지주·소작인으로 진주읍 보다 진양군 일원에 더 많이 거주했다.

1919년 당시에는 일본인이 대거 유입되어 약 2만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농촌 인구가 대도시로 진출하기 전이라 진주 인구가 10만 명 이상 12만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배영초등학교가 개교할 정도로 인구는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산청에서 나무 장사. 산나물 장사들이 모여 들었고 사천. 하동에서는 해산물과 농산물을 운반해 장날에는 서부 경남에서 수천 명이 모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진주 장날은 잔치 날처럼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초만원이었다. 또 진주3·1운동 주동자들도 옥고(獄苦)를 치른 정몽석. 정성오 선생 등은 하동 출신이고 최웅림 선생은 산청 사람이고 김영조 선생은 고성사람. 장덕익 선생은 사천(삼천포) 사람이다. 일반인 구성비도 약 25%정도는 진주가 아닌 이들이 동참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2만~3만 명의 시위는 가능한 일이다. 일본 경찰은 축소 보고하는 신분이었다.

진주시 문산읍에서 3·1운동에 관련된 전시회를 한다는 자막을 보고 5명이 문산읍사무소·파출소·시장을 찾아 가서 문의해도 전시회가 없다는 것이다. 11일부터 차 없는 거리와 반성면·금산면에서 전시회 한다는데 이번에도 사실인지 묻고 싶다.

3.1절 아침 경남문예회관 앞 전시물을 보니 한규상을 한규근이라 잘못기재하고 정용근을 강용근으로 잘못기재하고 최웅림를 최병림으로 잘못기재했으니 선생이 바담풍이라 해도 학생은 바람풍해야 된다는 교훈을 잊어 버렸으니 통탄스런 일이다.

진주 3·1운동은 3월 18일 12시에 울리는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5곳~6곳에서 일제히 시위하고 다음 날 3월 19일 11시경 큰 북, 작은 북, 코르넷, 나팔이 동원되었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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