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선승((禪僧) 원융이 그립다
진주성-선승((禪僧) 원융이 그립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17 15:4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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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봉스님/진주 여래사 주지·전 진주사암연합회 회장
동봉스님/진주 여래사 주지·전 진주사암연합회 회장-선승((禪僧) 원융이 그립다

그와 나는 때로는 도반(道伴)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서로 갑장이라고 부르면서 지냈는데 그가 떠나고 보니 세수가 나보다 두 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돼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 불교계의 내노라 하는 선승((禪僧)이었던 그는 우리 곁을 훌쩍 떠났다. 바로 대한불교조계종 해인총림 수좌(首座) 해우당 원융 스님이다.

지난 3일 노납은 원융 스님이 입적했다는 슬픈 소식을 해인사 지인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장탄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우리 불교계의 큰 별 하나가 또 스러졌구나"하는 탄식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지난 7일 해인사 보경당과 연화대에서 열린 영결식 및 다비식에서 나는 그를 기리며 보내 드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큰 슬픔을 삭이며 그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그와의 인연은 해인사에서 처음 시작됐다. 70년대 초에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일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그는 해인사 선원에서 용맹정진했다. 당시에 나는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를 할 때 였는데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이어졌다. 절에서는 선원과 강원에 거주하는 스님들이 서로 잘 융화가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와 나는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다.

내가 선방으로 그를 찾아갈 때도 있었고 그가 강원으로 나를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공부에 대해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내가 해인사를 떠나 진주의 사찰로 옮기면서 그와의 잦은 교유는 끊어 졌지만 간혹 서로 안부를 전하곤 했다.

그는 세속에서 많은 공부를 한 덕분인지 참으로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했다. 어린 시절부터 신학문을 배운 그는 광주제일고와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제기획원 산하기관에 근무하는 국가공무원으로 생활하다가 출가했다. 학벌도 좋고 공무원 출신이다 보니 가끔 어른 행세를 해서 도반들의 눈총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진도 잘하고 불평도 없이 성격도 쾌활하고 항상 밝은 모습이었다.

그는 소문난 녹차광 이었다. 보통사람들은 녹차를 마실 때 작은 다기에 차를 담아 마시는 것이 일반적지만 그는 큰 사발에다 녹차를 가득 담아 들이키고는 했다. 과유불급이라고 녹차를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다고 충고라도 할라치면 허허 웃음으로 답했다.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 선양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용맹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원융 스님,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선승 원융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봄 햇살이 그윽한 즈음 원융 도반의 모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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