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3·1운동 100년, 충절녀 월이(月伊)를 되새긴다
시론-3·1운동 100년, 충절녀 월이(月伊)를 되새긴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17 15:4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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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문학박사·고성향토문화선양회 회장
박서영/문학박사·고성향토문화선양회 회장-3·1운동 100년, 충절녀 월이(月伊)를 되새긴다

1년 12달. 한 해를 여는 1월에서부터 그 해를 마무리 하는 12월까지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어느 달 하나 나름 의미를 지니지 않는 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올 3월은 특히 우리 모두에게 또 다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다. 무자비한 공포가 한반도 전체를 짓누르던 일본 식민통치 하에서 어떻게 그런 전국적 비폭력 봉기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역사를 거슬러 지금 되짚어 보아도 쉽게 그 답이 찾아지지 않는다. 의문의 꼬리가 이어지는 새 어느덧 1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어떤 역사의 기록이든 힘을 가진 자의 행적은 언제나 뚜렷하다. 그 주인공은 황제나 왕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전장을 휩쓴 영웅이나 장수일 수도 있다. 권력이나 부를 한 손에 거머쥔 정치적 지배계층은 물론 신분세습과 함께 태어나면서부터 호사가 보장되는 귀족이나 양반계급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든 넘친다. 하지만 성도 이름도 분명하지 않고 신분조차 바닥을 기는 천민, 그 중에 오랜 세월동안 천대와 차별 속 괄시를 받아온 기생신분의 아녀자들의 기록은 흔치 않다.

3·1 독립선언문을 온 세계에 알린 민족대표 33인의 면면은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독립만세를 높이 외친 김향화 등 33명의 수원기생의 이름과 얼굴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지듯 깊이 잠자고 있던 이들의 이름은 불과 10여 년 전인 2008년에 와서야 겨우 독립유공자 명부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북 평양, 남 진주’라는 문구가 나오듯 경남 진주기생의 풍류와 기개는 옛부터 명성이 높았다. 역시 1919년 3월 19일, 남강 변에서 한금화(韓錦花)를 비롯한 일련의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촉석루를 향하여 “왜놈들 물러가라”고 목청을 돋우다 6명이 구금된 역사도 그렇다. 시대는 약간 앞서지만 을사오적 중 한 명으로 지금까지도 오명이 남아 있는 당시(1906년) 내무대신 이지용의 강권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며 단호히 뿌리친 진주기생 산홍(山紅)의 일화를 통해서도 신분을 초월한 우리 여인들의 높은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산홍의 얘기는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남아 있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시대를 거슬러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 남아 있는 경남 지방의 두 의녀(義女)이자 의기(義妓)의 얘기를 빠뜨릴 수 없다. 진주 기생 논개(論介)와 고성(固城) 기생 월이(月伊)다. 수많은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이지만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의 참상은 말 그대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논개와 월이는 임진국란 속 피어난 한 떨기 숭고한 핏빛 장미와 같다 하겠다. 진주성 싸움이 한창이던 1593년 남강 의암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안고 투신, 순절한 논개는 그나마 많이 알려졌으므로 고성의 월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조선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침략 루트탐문과 해변정찰, 전략지도 작성을 위해 첩자(세작)를 미리 보낸다. 이 중 한명이 고성주변 지형과 바닷길 지도 작성을 하던 중 월이가 기생으로 일하던 고성 ‘무기정’을 숙소로 잡아 드나들게 된다. 이상한 낌새를 차린 월이가 이 첩자의 눈을 속이고 그가 작성 중이던 고성의 바닷길 지도를 변조한다. 월이가 바꾼 지도는 왜 수군의 전략지도가 되고, 이 변조된 지도는 제1차 당항포 해전(1592년 6월)에서 조선수군이 대승을 거두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물론 이러한 월이의 행적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임란후 400여 년 동안 고성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올 뿐이다. 그래서 고성인들은 월이 구전설화를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성향토문화선양회’를 만들어 역사의 흔적 찾기에 부단히 노력을 쏟고 있다.

무지랭이 천민이어서, 홀대받던 여자 신분이어서 한 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이들의 행적을 찾아내고 그 공을 드높이는 일은 오늘날 후손인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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