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영/문학박사·고성향토문화선양회 회장
박서영/문학박사·고성향토문화선양회 회장-3·1운동 100년, 충절녀 월이(月伊)를 되새긴다1년 12달. 한 해를 여는 1월에서부터 그 해를 마무리 하는 12월까지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어느 달 하나 나름 의미를 지니지 않는 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올 3월은 특히 우리 모두에게 또 다른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다. 무자비한 공포가 한반도 전체를 짓누르던 일본 식민통치 하에서 어떻게 그런 전국적 비폭력 봉기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역사를 거슬러 지금 되짚어 보아도 쉽게 그 답이 찾아지지 않는다. 의문의 꼬리가 이어지는 새 어느덧 1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어떤 역사의 기록이든 힘을 가진 자의 행적은 언제나 뚜렷하다. 그 주인공은 황제나 왕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전장을 휩쓴 영웅이나 장수일 수도 있다. 권력이나 부를 한 손에 거머쥔 정치적 지배계층은 물론 신분세습과 함께 태어나면서부터 호사가 보장되는 귀족이나 양반계급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든 넘친다. 하지만 성도 이름도 분명하지 않고 신분조차 바닥을 기는 천민, 그 중에 오랜 세월동안 천대와 차별 속 괄시를 받아온 기생신분의 아녀자들의 기록은 흔치 않다.
3·1 독립선언문을 온 세계에 알린 민족대표 33인의 면면은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독립만세를 높이 외친 김향화 등 33명의 수원기생의 이름과 얼굴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지듯 깊이 잠자고 있던 이들의 이름은 불과 10여 년 전인 2008년에 와서야 겨우 독립유공자 명부에 오를 수 있었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시대를 거슬러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 남아 있는 경남 지방의 두 의녀(義女)이자 의기(義妓)의 얘기를 빠뜨릴 수 없다. 진주 기생 논개(論介)와 고성(固城) 기생 월이(月伊)다. 수많은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이지만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의 참상은 말 그대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논개와 월이는 임진국란 속 피어난 한 떨기 숭고한 핏빛 장미와 같다 하겠다. 진주성 싸움이 한창이던 1593년 남강 의암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안고 투신, 순절한 논개는 그나마 많이 알려졌으므로 고성의 월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조선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침략 루트탐문과 해변정찰, 전략지도 작성을 위해 첩자(세작)를 미리 보낸다. 이 중 한명이 고성주변 지형과 바닷길 지도 작성을 하던 중 월이가 기생으로 일하던 고성 ‘무기정’을 숙소로 잡아 드나들게 된다. 이상한 낌새를 차린 월이가 이 첩자의 눈을 속이고 그가 작성 중이던 고성의 바닷길 지도를 변조한다. 월이가 바꾼 지도는 왜 수군의 전략지도가 되고, 이 변조된 지도는 제1차 당항포 해전(1592년 6월)에서 조선수군이 대승을 거두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물론 이러한 월이의 행적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임란후 400여 년 동안 고성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올 뿐이다. 그래서 고성인들은 월이 구전설화를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성향토문화선양회’를 만들어 역사의 흔적 찾기에 부단히 노력을 쏟고 있다.
무지랭이 천민이어서, 홀대받던 여자 신분이어서 한 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이들의 행적을 찾아내고 그 공을 드높이는 일은 오늘날 후손인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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