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경남 고성군 윤영백 항일투사
진주성-경남 고성군 윤영백 항일투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20 15:0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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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경남 고성군 윤영백 항일투사

윤영백 선생은 1884년 2월 2일 경남 고성군 하일면 용암에서 태어나 사립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후 망국의 한을 품고 서간도 봉천현 환인현으로 이주하여 아우 윤영기와 함께 그곳에 사는 윤세위, 송병헌, 서세명, 김문필 등과 한교공회를 조직하여 동포들을 규합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준비하고 1919년경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했다.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지령으로 군자금 모집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여 곽인협, 허재기 등을 만나 애국의 길을 의논하게 된다.

고성군 영현면 정양구, 마능숙, 승려 한봉실 등을 찾아가 독립선언서와 독립단 인장을 제시하고 군자금을 수합하다 일경에 발각, 피체되었다.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하였고 부산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제령 제 7호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이 언도되었고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3년 1월 10일 출옥하였다.

<고성군지>368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윤영백 선생은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 땅을 일제의 토지조사에 의해 동양척식(주)가 지주가 되고 땅 주인은 소작인으로 전락해 겨우 살다보니 견딜 수 없어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의 길을 나서게 된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 환인현에서 3·1운동을 전개했다.

한교공회를 조직하여 조직부는 윤영백, 병사부는 아우인 윤영기가 맡아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했다.

1920년 10월부터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이상룡의 지도를 받아 군자금(軍資金) 모금을 시작하게 되는데 지리를 잘 아는 향리일원에서 정형구, 마능숙, 윤보한, 최경진, 이완수 등으로부터 군자금 3만원을 받기로 했다.

옥천사의 한봉실, 신화수 등으로부터 창원군 내서면 최병화, 칠원면 박수윤, 구찬수 등으로부터 군자금 250원을 받았고 그동안 협조해 오던 윤보한의 요구를 거절하자 밀고로 일경의 추격을 받기 시작했다.

윤영백 선생은 수개월간 피신했으나 1920년 남해군 창선면에서 일경(日警)에 피체되고 말았다.

2년 만에 출옥(出獄)했다. 정부는 윤영백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5년 11월 16일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 2묘역 540호에 안장되었고 부인 이대산도 함께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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