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흙 속의 자벌레같이 산다는 것
도민칼럼-흙 속의 자벌레같이 산다는 것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21 15:3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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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주/경상대학교 강사
조효주/경상대학교 강사-흙 속의 자벌레같이 산다는 것

밤실댁은 신경통 때문에 슬프다
성기각

캐어도 캐어도 가난 뿐인
밤실댁은 슬프다
흙 파먹고 산다는 것이
문딩이 같아서
들일에서 돌아와 구정물에 손 담그면
신경통 때문에 다리가 저린다
팔이 저린다 허구헌날
무학소주 됫병 차고 앉아 묵은 가래만 내놓는 지아비
지아비 해소 끓는 소리에 관절이 부어오르는
밤실댁의 저녁 한 때
막내아들은 지금쯤 경운기를 몰고
오늘도 투덜투덜 신경질로 올는지 몰라
흙 속에서 자벌레같이 산다는 것이
문딩이 같아서 드응신 같아서
대추나무 이파리 떨어지는 소리에도
막소주같은 눈물이 흐르는 저녁
반푼이 같은 니 애비를 용서하거라
자식이란
소나기 맞은 오뉴월 쇠비름 같은 거라서
지 맘껏 커야 하는데
오늘도 새벽잠을 설치며
다리 관절을 주저앉히는 밤실댁.

농민시를 쓰고 농민시를 연구했던 시인 성기각의 󰡔일반벼󰡕(2000)에는 고향과 농촌을 향한 시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시인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땅을 일구는 농부의 삶을 선택하면서 비로소 농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에서 길어 올린 삶의 세목을 살아있는 언어로 형상화한다.

성기각 시인의 시에는 그가 자란 창녕의 소벌과 거기 깃들어 사는 상기댁, 밤실댁, 산동댁, 김천 아재, 충경이 아재, 보리뫼 형님, 승호 형님 같은 수많은 농민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소박한 삶은 저녁노을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배경에는 아프게 와 닿는 농민들의 깊은 한숨과 눈물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어스름 속에서 괭이를 어깨에 메고 가는 농부의 뒷모습이 쓸쓸한 흑백 이미지로 그려진다.

밤실댁은 신경통 때문에 슬프다」에 등장하는 밤실댁은 그 택호만으로도 고향마을이나 시골 외갓집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캐어도 캐어도” 가난뿐인 “문딩이” 같은 일상이 있고, 가족을 위해 논과 밭에서 땀을 흘리는 믿음직한 남편 대신 소주 됫병을 차고 앉아 “묵은 가래만 내놓는” 해소병 환자가 있다. 그리고 여느 아들들처럼 도회지로 나가 꿈을 펼칠 나이에 “흙 속에서 자벌레같이” 사느라 마음껏 크지 못한 막내아들이 있다.

화자는 밤실댁이 슬픈 건 신경통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밤실댁의 슬픔이 신경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쉽게 눈치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와 가난 때문에 고향에 남아 경운기를 몰아야 하는 막내아들과 소주 됫병이나마 있어야 짧은 잠을 청할 수 있는 남편, 이들이 저녁마다 슬픔을 길어 올리는 밤실댁의 깊디깊은 우물이라는 것을 안다.

몇 년 전 도올 김용옥 선생은 “농업 농촌은 우리 문명의 가장 기본 공통함수”임을 강조하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주문했다. 농촌이 안고 있는 문제가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방증하는 발언이다. 우리나라의 농촌문제는 아주 오래된 숙제와도 같다. 그러나 그 숙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밤실댁은 “새벽잠을 설치며/ 다리 관절을 주저앉”힌다. 흙을 파먹고 사는 일이 “문딩이” 같고 “드응신” 같아서 밤마다 두레박으로 막소주 같은 슬픔을 길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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