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근심을 푸는 곳
칼럼-근심을 푸는 곳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25 15:5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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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근심을 푸는 곳

변비가 심한 사람들은 화장실에 가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한다. 또 집을 떠나 여행을 할 때 설사병을 만나면 그것만큼 사람을 긴장시키는 일도 없다. 어떻든 인간사 먹고 배설하는 일 만큼 큰일도 없다. 먹고 난 후 뒤처리를 하는 명칭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옛날에는 통시, 뒷간, 변소(便所), 측간(廁間)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화장실로 통용되고 있다. 절에 가면 해우소(解憂所)라고 한다. 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해우소’라는 단어는 없고 ‘해우(解憂)’라는 단어는 있는데 ‘근심을 없앰’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근심을 푸는 곳, 또는 근심을 없애는 곳’이라고 하면 적당한 풀이일 것이다. 옛 스님들의 지혜와 해학이 엿보이는 이름이다.

예부터 절간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변소에는 뒷간을 지킨다는 ‘측신(廁神)’과 ‘담분귀’ 같은 귀신이 살고 있다고 한다. 화장실을 들어갈 때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것은 이들에게 사람이 들어감을 알리려는 동작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일을 보기 전에 입측진언(入厠眞言)을 외우라고 가르친다. 이 진언은 말 그대로 변소에 들어갈 때 외는 일종의 주문 같은 것이다. 입측의 게송을 외워야 담분귀가 똥을 먹다가 비켜 준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곧바로 일을 보면 담분귀가 화가 나서 그 사람에게 발길질을 한다고 한다. 똥을 뒤집어쓴 바람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담분귀에게 발길질을 당한 이는 이내 배탈이 난다고 율장은 이르고 있다. 화장실에 사는 중생에게까지도 자비의 마음을 아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가볍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고승인 도선율사(道宣律師:596∼668)는 계행이 청정하기로 이름난 분이었다. 어느 날 스님이 길을 가다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때 누군가 와서 일으켜 세우는 이가 있었다. “도대체 누구시길래 나를 일으켜 세워 주는 것이오?” “네, 저는 북방 비사문천왕의 아들입니다. 스님의 계행이 청정하여 언제나 모시고 다닙니다.” “그렇다면 넘어지기 전에 잡아 주어야 할 것 아니오.” “스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싶지만 몸에서 나는 구린내 때문에 삼 십리 밖에서 따라다니며 모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스님은 입측진언을 하지 않아서 늘 구린내가 남아 있습니다.”그 뒤부터 도선율사는 변소를 드나들 때 입측진언을 말하고 문을 두드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절 집 뒷간으로는 해인사를 꼽는다. 일을 끝내고 바지춤을 추스를 즈음에야 저 밑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해인사 뒷간은 아래가 아득하게 깊다. 깨끗하기로는 송광사 불일암을 꼽는다. 너무 깨끗해서 팻말이 없으면 뒷간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냄새가 나지 않는 점도 특징이다. 일을 보고 난 뒤 낙엽으로 배설물을 덮어 주는 일이 악취를 예방하는 비결인 듯하다. 또 멀리 떨어져 있기로는 문경 봉암사가 유명하다. 선방채와 멀리 떨어져 있어 급할 때는 큰스님도 작은 스님도 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봉암사 스님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 분 일찍 일어나자.” ‘아침 식전 화장실에 가는 이는 건강한 체질이고, 식후에 가는 이는 그 다음이고, 일정한 시간 없이 들락거리는 이는 건강 조절에 실패한 사람이다.’라는 말도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입측진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버리고 또 버리어 큰 기쁨 있어라. 탐진치(貪嗔癡) 삼독도 이와 같이 버려, 한순간의 죄업도 없게 하리라.

어느 스님이 세간에 나와 화장실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 화장실 입구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多不有時’ 특별한 사자성어인 줄 알고 이리저리 해석을 해 보아도 그 뜻이 와 닿지 않아 궁금증을 풀기 위해 주인에게 물었는데 화장실을 뜻하는 W·C.를 소리 나는 대로 한문으로 적어 놓았다는 말을 듣고 한참 웃었다고 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시간은 있는데 많지 않다.’로 해석하고 싶다. 세상만사가 다 시간에 쫓기고 살아간다는 교훈이 아닌가 한다. 영어로 표현하면 toilet, water closet(略:W.C), rest room, washroom. lavatory이다. 우리나라에도 영어열풍이 세게 불어 닥칠 때였던 1980년대부터 2000년대에는 영어식 표현이 난무하기도 했다. 요즘은 세간에 간간히 多不有時로 아주 예쁘게 목판에 품격 높은 서예글씨로 써서 매 달아 놓은 곳도 더러 있다. 이런 곳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면 더 시원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의 욕심도 날마다 배설하듯 비워 내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욕심이 넘치면 우리네 인성에서 뒷간에서보다 더한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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