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임진왜란 대공 효열공 고종후
진주성-임진왜란 대공 효열공 고종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4.03 16:1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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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임진왜란 대공 효열공 고종후

고종후(高從厚)장군의 시조는 제주에서 유래되었다. 조부는 맹영인데 대사간으로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부친의 휘는 경명(敬命)이니 뒷날 공조참의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이며 호는 제봉이다. 모친은 부제학 김백균의 딸이다.

고종후 장군이 24세 되던 해인 1577년(선조 11년)문과에 급제하고 교서관. 예조좌랑이 되었다. 1592년 4월 부산에 왜군이 쳐들어오자 선조임금은 거병을 명하였다. 충청감사와 경상감사가 군병을 모아 경기도 용인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혼비백산 궤멸되고 말았다.

1592년 5월 19일 담양군 추성관에 모인 군병들이 고경명을 대장으로 추대하였고 유팽로, 양대박, 이대윤, 최상중, 양희적 등으로 하여금 군량을 조달케 했다. 김인혼. 오유 등이 동참하고 7천 여명이 모였다.

양산숙이 임금님 앞에서 남방의 사태를 아뢰니 선조가 양산숙에게 “돌아가 고경명, 고종후 부자에게 말하라 너희들이 빨리 수복하여 얼굴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여라”

7월 1일 연산으로 진을 옮겨 호서 의병장 조헌에게 격문을 보내 양측이 금산의 적을 토벌하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방어사의 진이 무너지자 일군의 공격을 받고 부친 고경명과 아우 고인후가 순절한 사실을 알고 죽으려 하자 좌우에서 만류하였다.

장례를 치르고 2개월 만에 군사를 모아 별군을 만들어 조수준. 김인흔. 고경신. 스님 해정을 유격장과 군관으로 삼고 스스로 복수 의병장이라 호칭했다.

고종후 장군은 의군을 이끌고 하동군 고전을 거쳐 진주성에 도달하자 성안의 군민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원수. 순변사. 곽재우. 임계영. 선거이 등은 진주성에 입성하지 않았다. 고종후 장군은 나라의 특별한 명령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는 직분이었으나 사생유명으로 진주성에 들었으니 훌륭하지만 고립무원이었다.

김천일 군사 300명. 황진은 700명, 최경회 500명. 장윤은 300명. 이잠은 300명, 고종후는 400명의 군사를 영솔했다.

남해안과 경남 일원에서 피난민 6만여 명이 찾아 들었다. 적군과 진퇴를 거듭하다 창의사, 우병사 등이 순절했다. 고종후 장군 역시 함께 순국, 순절해 촉석루 3장사에 들었다.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를 기리어 서기 1595년에 정려가 세워지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그 후 효열(孝烈)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광주 포충사와 진주 창렬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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