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미(微)에 신(神)이 있느니라
시론-미(微)에 신(神)이 있느니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4.07 15:2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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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미(微)에 신(神)이 있느니라

다음 글은 필자가 감동적으로 읽은 예화다. 글의 문면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글쓴이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글쓴이는 자신의 미국 유학 시절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해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교양과목으로 심리학을 들을 때였다. 제니라는 교수가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만일 사흘 후에 죽는다면! 교수는 학생들에게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세 가지만 순서대로 말해 보라고 했다. 맨 먼저 평소 말 많은 친구 마이크가 입을 열었다. 부모님께 전화하고, 애인이랑 여행가고, 작년에 싸워서 연락이 끊어진 친구한테 편지 쓰는 것으로 사흘을 쓰겠다! 학생들은 저마다 웅성거리고 글쓴이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글쓴이의 생각은 이랬다. 부모님과 마지막 여행을 간다, 꼭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던 고급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그간의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일기를 쓴다!

20분쯤 지난 뒤 교수는 학생들의 대답을 듣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죽음을 전제한 사람들의 세 가지 소망이 다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제니 교수는 칠판으로 다가가 단 한 마디를 적었다. Do it now! 바로 지금 하라! 들뜨고 어수선했던 강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 한 마디야말로 유학 중에 익힌 어떤 학문이나 지식보다 값진 가르침이었다…”

너무도 쉬운 논리인데, 이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자칫 우리에게 허여(許與) 되어 있는 시간이 무한대인양 착각하며 산다. 그래서 작지만 소중한 문제들을 소홀히 하고, 할 수만 있다면 다음 기회로 미룬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와 같은 상황으로 허비한 시간과 그렇게 해서 놓친 사람이 얼마인가. 작은 문제를 얕보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 그 작은 문제들이 모여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또 얼마인가.

한국문학의 20세기 중·후반기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이병주(1921-1992)는 자기 글의 소제목으로 ‘미(微)에 신(神)이 있느니라’라는 레토릭을 사용했다. 우리 삶의 여러 절목 가운데 작고 소박한 ‘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집적하여 의미와 가치를 생성하는 ‘신’은 또한 무엇인가. 어쩌면 이 양자 사이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 우리 인생의 행로인지도 모른다. 그 행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원숙해지고 그 배면에 이를 부양하는 세월의 경륜이 쌓여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체득할 수 있는 깨달음의 길일지도 모른다.

작은 것에 충실해야 한다는 작고도 큰 원리를 삶의 현장에 적용할 때,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작은 시간을 귀하게 쓰는 태도다. 〈15분〉이라는 단막극이 있다. 한 유능한 젊은이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15분에 그동안 소원하던 여러 가지 성취의 소식을 듣지만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줄거리다. 시간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극단은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겪은 ‘최후의 5분간’이다. 사형수였던 그가 집행 5분전 절체절명의 순간을 넘기고 사면을 받는 실제 장면이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 그는 비로소 인류문학사의 대문호가 되는 길을 걸었다. 이 여러 국면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아끼며 살 것인가를 가르친다.

작은 것을 지키는 데에 ‘시간’ 못지않은 절실함을 가진 삶의 항목이 ‘약속’이다. 작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는 당연히 큰 약속도 지키지 않는다. 영국의 사회운동가였던 쉐프츠베리 경(卿)은 한 거지 소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중요한 일정을 포기했다. 약속을 하고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잊어버리거나 태연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는 곧 후진성의 지표를 말한다. 누구나 잘 알면서도 쉽게 간과하는 이 삶의 ‘원리’를 숙고해보면, 누구나 당장 바로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보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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